2022. 2. 25. 09:49ㆍMISCE.
지귀는 오늘도 대낮부터 밥 대신 마신 막걸리에 취해 있었다. 일구월심 사모하고 있던 여왕께서 이곳 영묘사에 온다는 소식을 들었기에 노가다 일도 안 나가고 아침부터 절 앞에 서서 기다리다가 허기에 지쳐 막걸리 몇 잔을 걸친 터였다. 몸이 많이 약해져서인지 식욕이 안 나서 술 몇 잔으로 아침을 때운 참이었다. 그러다가 10시 쯤 여왕이 도착하여 절로 들어갔으나 호위 군사들에 휩싸여 일주문 안으로 들어가는 바람에 여왕의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한 터였다. 이제 나오기를 기다려야 했다.
서라벌에서 모두에게 바보라고 불리는 지귀는 마음은 착했지만 푼수가 없이 어딘가 모자라는 구석이 있는 청년이었다. 그는 조금 모자라는 데에다 사람들이 바보라고 놀리는 통에 일다운 일도 얻어서 하지 못하고 건축현장에서 허드렛일이나 해주고 겨우 입에 풀칠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몇 달 전 황룡사 수리공사에 갔다가 마침 불공을 드리러 온 선덕여왕을 먼발치에서 보게 되었다. 여왕은 너무나 아름다웠고 심성마저 고와 보여서 자기에게 꼭 맞는 배필로 생각되었다. 지귀는 그 순간, “덕만!”하고 여왕의 처녀 적 이름을 외치면서 여왕에게 달려가려고 발걸음을 떼어 놓았다.
그러나 호위군사들이 그를 막아서고 다짜고짜로 매질하는 바람에 여왕을 만나 보지도 못 하고 낭패만 보았었다. 그 일이 있은 후 지귀는 상사병에 빠져서 머리가 잘 못 되었는지 실성 들린 사람이 되어 남들 앞에서도 여왕의 이름을 마구 부르고 여왕이 자기의 애인이라고 뗘들고 다녔다. 그럴 때마다 사람들은 그를 조롱하고 어느 때는 매를 때려 멀리 쫓아 버리곤 했다
여왕이 백제와 싸우다가 전사한 장병들을 위해 열리는 팔관회에 참석하기 위해 오늘 영묘사에 오신다는 소문을 엊그제 들은 지귀는 영묘사 앞에서 일찍부터 진을 치고 여왕을 기다렸다.
“오늘 드디어 여왕님을 만나서 나의 이 애타는 마음을 받아 주십사고 부탁해야지.”
행사를 위해 절 안에 들어간 여왕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이번엔 꼭 만나야 한다.)
조바심이 났다. 기다림에 지쳐 으슬으슬 춥기까지 했다. 막걸리에 취한 그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또 여왕의 이름이 튀어 나왔다.
“덕만, 덕만, 어서 나오시오.”
그런데 여왕을 보려고 절 앞에 서있던 사람들 중 몇 사람이 갑자기 그에게 다가왔다.
“이런 죽일 놈! 네 놈이 아직도 여왕님 이름을 함부로 부르고 욕보이느냐? 혼 좀 나봐라”
그들은 지귀를 패기 시작했다. 그 총명함과 아리따운 자태로 신라 사람들의 흠모를 받고 있는 처녀여왕에 대한 서라벌 사람들의 칭송과 찬사는 대단했기에 바보 같은 말이나 뱉어내는 지귀에게 가해지는 매는 그 만큼 더 매서웠다. 지귀는 그만 혼절하고 말았다.
이때 여왕이 긴 행사 끝에 일주문 밖으로 나오고 있었다. 오늘은 다른 때보다 궁궐로 돌아가는 시간이 늦었다. 백제와의 전쟁에서 순국한 장병들이 너무 많아서 그들 하나하나의 이름을 부르고 극락왕생을 비느라 시간이 꽤 흐른 탓이었다. 웅성거리는 군중을 본 여왕이 물었다.
“무슨 일이지? 저기 쓰러져 있는 젊은이는 누구냐?”
비서실장이 답했다.
“별 일 아닙니다. 여왕님을 사랑한다고 하는 지귀라는 미친놈인데 좌팝니다. 걸음을 옮기시지요.”
여왕은 집히는 게 있었다.
(서라벌에 떠도는 소문에 날 사랑한다는 그 바보 청년이구나. 고마운 일이지. 사람들은 미쳤다고 욕하지만 심성은 착한 청년이 아니겠나?)
“아니오, 그럴 수 없오, 내가 직접 봐야겠소.”
여왕은 사람들을 헤치고 지귀가 쓰러져 있는 곳까지 다가갔다. 그는 엷은 웃음을 입가에 띤 채 혼절해 있었다. 사람들 말이 다행히 큰 상처는 없고 지금 자고 있으니 한참 있으면 깨어날 거라고 했다. 한참 그를 바라보다가 그의 이마에 손까지 대어보던 여왕은 팔목에 감고 있던 팔찌를 빼어서 그의 가슴 위에 두고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에게 흠씬 두드려 맞고 잠이 들었던 지귀는 겨우 깨어났다. 군중은 흩어져 아무도 없는데 서쪽으로 해가 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의 손에 만져지는 게 있었다. 그의 가슴을 지그시 누르고 있는 금팔찌였다.
(이게 뭐지? 아, 여왕님의 팔찌로구나! 어떻게 이런 일이.....)
그의 눈에서 기쁨의 눈물이 흘렀다.
“덕만, 당신은 나를 사랑하고 있어. 아, 덕만, 고마워.”
그는 여왕의 금팔찌를 가슴에 꼭 껴안고 기뻐서 어찌할 줄을 몰랐다. 그러자 그 기쁨은 다시 불씨가 되어 가슴 속에서 활활 타다가 온몸이 불덩어리가 되었다. 불길은 영묘사 일주문으로 옮겨 붙더니 회랑을 태웠다. 그리고 탑을 태우고 금당을 태우더니 요사채로 옮아 그 큰 절을 다 태워 버렸다. 서라벌에서 보기 힘든 큰 화재였다.
- 후기 -
오 마이 갓! 그 작은 가슴에서 질러진 불이 큰 불이 되어 지금 같으면 119를 불러야 할 상황이었다니.
지귀 이야기를 하다보니 문득 나도 주위사람도 모두 불조심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실을 둘러보니 마침 구석에 빨간 소화기 하나가 눈에 뜨여 그나마 걱정이 덜어졌다.
그래도 난 이 지귀란 놈과 거리를 두어야겠다. 지귀를 불렀다.
“지귀야, 너와 나 사이에 차디차고 큰 바다나 하나 지질러 놓자꾸나!”
(삼국유사의 이야기에 가필한 픽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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