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속에서(1967년 4월)

2006. 7. 26. 14:24MISCE.

 

숲 속 에 서


 숲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까마는 갓 피어난 널따란 잎사귀들을 바람에 흔들거리며 맑은 하늘아래 청춘을 맘껏 구가하는 숲은 참으로 좋다. 숲 속에는 자연의 사랑이 있고 그늘이 있고 다사로움이 있어서 좋다. 또한 숲속에는 고요함이 있고 詩想이 있고 겸손이 있고 꾸밈이 없는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이 있어서 좋다.

 숲은 짙지 않아서 좋다. 엷은 초록의 빛깔이 드리운 숲 속, 숲은 따가운 햇볕을 가리되 아주 차단하지도 않는다. 또한 큰바람을 막아 주되 솔솔 바람마저 삼키지는 않는다. 그래 숲 속에 앉으면 부드러운 그늘은 어디에나 깔려 있고 솔솔 바람은 항시 불어온다. 보아도 보아도 피로하지 않은 초록색은 조물주의 조화의 극치를 보여준다고나 할까

 숲은 꾸밈이 없다. 나무, 풀씨를 말려버린 아스팔트길의 문명의 꾸밈도 없고 선택된 꽃들만이 자라고 있는 꽃밭의 인공의 꾸밈도 없다. 거기엔 오직 꾸밈이전의 자연의 균형만이 있을 뿐이다.

 숲속에서는 잡초도 잡목도 여느 풀, 여느 나무와 다름없이 제 자랄 대로 자라고 있다. 능력껏 살고 능력껏 뻗어나가는게 숲세계의 법이다. 따라서 여기엔 선택된 삶, 싸워 쟁취한 특권은 없다. 잡초라고 뽑히어지고 잡목이라고 베어질 염려도 없이 제 지껄일 대로 지껄이는 새소리와 자연의 법을 좇는 짐승들 사이에서 제 마음대로 살아가는 게 숲세계다. 거기엔 짙은 증오도, 짙은 질투도, 짙은 행복도 없다.

 그러기에 숲은 법이전의 원시의 세계다. 그러나 또한 현대가 지향하는 이상의 세계다. 완전한 자유 능력에 따른 평등이 실현되고 있기 때문이다. 결실의 원천인 햇살을 높이 자란 양지나무들이 다 받는다고 탓할 것도 없다. 그 다음은 반 양지 반음 나무들이 남은 햇살을 받으면 된다. 그래서 그늘 속에선 음지나무들이 그들대로의 생활을 계속한다.

 숲은 그러기에 분수를 안다. 남이 내 뒤에 가리었다고 반항할 필요도 없으며 남이 자기의 그늘 밑에서 큰다고 해서 부끄러워할 것도 없다. 그렇게 자라 가는 것이 숲의 질서요 숲속에서의 짙지 않은 행복이 이루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숲은 현대를 살아갈 줄 아는 지성인이다. 숲은 제 분수를 알기에 땅에서 얻은 것을 땅으로 돌려보낸다. 해마다 경작되어 양분의 마지막 한 움큼까지도 곡식들이 흡수해선 인간에게 바쳐지는 들과는 다르다. 숲은 겸허하게 받아들인 햇빛과 능력껏 빨아올린 수분과 양분으로 잎새를 만들고 열매를 맺는다.

 그러나 그것을 다시 숲바닥에 떨어뜨리어선 다시 숲의 땅으로 양분을 돌려보낸다. 이러한 겸허한 숲이지만 자기 자신의 양분을 잃는 일도 없다. 황토의 땅이 비만 오면 이로운 것 해로운 것 모두 다 떠내려 보낼 때도 숲은 침착하다.

 그는 나뭇잎들 사이마다 물을 모아선 가만가만 아래로 모아가지곤 작은 시냇물을 만든다. 작은 시냇물이지만 가뭄에도 마르는 법이 없도록 숲은 넉넉히 물을 저장한다. 겸허하게 분수를 지키고 침착하게 격렬한 홍수를 가라앉히며 끊임없이 삶의 노래를 부르는 숲은 정녕 현대를 살아갈 줄 아는 지성인이다.

 또한 숲은 철학을 배운 현대인이다. 숲은 생활의 조화를 잃지 않는다. 숲은 격하지도 않으며 짙지도 않다. 양분을 잃은 전답이 황무지로 변해도 또한 그 황무지가 불도저로 깎이어서 문화 주택이 서고 해도 숲은 변함이 없이 자신의 질서대로 조화를 지켜갈 뿐이다.

 아무리 큰비가 내려도 아무리 큰바람이 불어도 숲은 격하지도 않으며 숲은 노하지도 않는다. 다만 철학자다운 고요함과 침착을 가지고 소리 없이 물을 흡수하고 작은 솔솔 바람으로 변화시킬 뿐이다.

 실로 숲속엔 자연의 사랑이 있고 짙지 않은 그늘이 있고 다사로움이있고 원시의 고요함이 있으며 끊임없는 시냇물의 음악이 있고 소박한 미가 있다. 그러기에 현대가 지향하는 이상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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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7년 고등학교 3학년 때 쓴 글입니다. 지금 와서 보니 유치하지만 실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