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70225 오대산 산행기 : 성지순례 팀에 끼어 백의종군하다.

2007. 3. 11. 14:45명산산행기 Famous mountains

2007년 2월 25일 일요일.

 

우리나라 불교의 성지인 오대산을 갈 수 있어 기뻤다. 오대산하면 떠오르는 것들이 제법 많다. 가을철 단풍이 괜찮다던가 겨울의 눈경치가 끝내준다거나 돌이 적은 육산이어서 편하게 걸을 수 있다던가, 산이 높아서 멀리까지 시원한 경치를 즐길 수 있다던가 하는 이러저러한 오대산의 매력은 웬만한 산객들은 눈치챘으리라.


그러나 내게 있어 오대산의 매력은 우리 선조들의 신앙의 성지라는 데에 두고 싶다. 아름다운 자연경치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은 그 산하에 묻어있는 역사와 문화의 무게인 것이다. 신라시대 선조들은 이곳 오대산을 불교신앙의 성지로서 문수보살과 부처님이 상주하는 곳으로 설정하고 그들의 아름다운 신앙을 지켜가려 한 것은 아닐런지?


신앙이 깊었던 분들 중에도 자장율사는 가장 윗자리에 있어야 할 분이다. 약 1,400년전에 태어난 그의 신앙심이 얼마나 순수하고도 깊었는가를 보여주는 여러 이야기는 삼국유사를 읽으면 잘 알 수가 있다. 자장은 일찍이 중국에 유학하여 중국의 불교성지인 오대산에서 화엄을 연구하였으며 실천하는 신앙인으로서 매일 밤 깨달음에 대한 사모함으로 고뇌하는 중에 문수보살을 뵙게 되고 부처님의 진신사리와 불경 등을 구하여 신라로 돌아왔다.


신라에 돌아온 그의 아이디어와 노력으로 거대한 황룡사 구층탑이 세워지게 되고, 서라벌에서 가까운 양산에 통도사를 세워 금강계단을 짓고 거기에 진신사리를 모셨으며 통도사를 스님들이 수계를 받는 곳으로 하였다. 이에 선덕여왕은 그를 國師(나라의 스승)에 임명하여 국가의 어려운 일들에 진언하도록 하였으니 그의 공적은 불교신앙을 융성하게 할 뿐 아니라 불교를 중심으로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신라의 국토를 넓히고 안보를 튼튼히 하며 민생을 안정시키는 데에까지 이르렀으니 참으로 큰 그릇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그는 경건한 종교인일 뿐 아니라 국가의 안위를 돌보는 고급의 군사전략가였다고도 할 수 있겠다. 왜?인고 하니 그가 고구려 영토였던 이곳 오대산을 신라의 국토로 편입시키고 말뚝을 박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하이맛의 구라는 오대산을 오르면서 이스트를 넣은 빵처럼 한껏 부풀어 올라 상상의 날개를 편다. 이게 오대산의 힘, 하마부인의 고향 강원도의 힘인가?)


반도의 구석에서 늦게 깨어 나라를 시작한 신라는 문물이나 종교를 대륙에서 받아들이는 데에서 백제나 고구려보다 늦을 수 밖에 없었다. 지정학적으로 중국과 직접 연결도 안 되기에 더더욱 불교같은 고급문화를 도입하는 데에도 한 수 늦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새는 줄 모른다는 말처럼 신라인들의 신앙심은 대단했다. 이러한 기미의 시대정신을 자장율사가 모를리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아주 명민하고 모범적인 사람이기에 선덕여왕이 높은 벼슬을 내리려고 하였으나 계속 사양하여 여왕의 분노를 사기까지 하였으나, 그의 야심은 한갓 관료로서 국가에 봉사하느니 새로운 진리로서 전해진 불교를 체계적으로 완전히 이해한 다음 국가를 위해 더 큰 공헌을 할 수 있다는 논리로 여왕을 설득시키고 당나라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당나라에는 이미 불교가 융성하고 있었고 당의 오대산(혹은 종남산으로도 부름)은 이미 불심을 닦고 공부하는 불교 문화의 중심이 되어 있기에 자장도 그곳에서 밤낮으로 새로운 진리를 사모하며 심신을 닦게 된다. 드디어 그의 지극한 정성은 감응받게 되고 문수보살을 친견하며 밤에 神人을 만나기도 하는 등 그의 공부는 결실을 맺게 되니 당의 황제가 주는 불교서적을 들고 서라벌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로 돌아온 그는 신라를 아예 불교왕국으로 변모시키려는 아이디어를 갖게 된다. 우선 ‘신라불국토설’이라는 이론을 내놓게 되는데 신라땅은 이미 수만년전에 부처님과 그의 제자들이 평화롭게 살던 곳이라고 주장한다. (그 증거로 황룡사터에 있던 장육존상의 좌대를 들고 있다.) 부처님의 나라가 다시 신라땅에 세워져야 하는 원리이다.


또한 중국의 오대산이 부처님이 계신 성스러운 곳이라면 우리 신라에도 그 못지 않은 성지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는 가끔 분쟁이 발생하는 북쪽 국경이자 고구려땅인 오대산을 지목하였다. 이미 국사라는 국가안보위원장을 능가하는 지위를 부여받은 자장율사는 변복으로 이곳 오대산을 찾아 수개월간 지형지물은 물론 민심까지도 살피게 된다. 그의 정성과 애국심이 오대산 획득이라는 대어를 신라에게 안겨주게 되는 것이다.


최고봉인 비로봉에서 흰 수염을 흩날리는 자장율사.

‘끝내주는 경치로구먼. 그래. 여기야.’

 

그는 말뚝을 박아버리고 사람들에게 선언합니다.

 

‘이곳 신령한 땅 다섯 봉우리에 부처와 보살들이 살고 계시다. 나는 내가 가져온 진신사리를 적멸보궁에 모시리라. 그리고 이 산의 이름은 이제부터 오대산이라고 부르자. 그리고 신라는 원래 부처나라였으니 블교성지는 모두 신라땅으로 편입됨이 마땅하다. 조금 있으면 우리 신라군이 이곳을 접수할 것이다.’


중국에 신령한 산이 있어 그 이름 오대산인데 신라사람들 모두 거기에 가서 기도하고 또한 부처님과 보살들을 만나보고 싶어 했다. 그러나 이제 신라에도 더 신령한 장소가 같은 이름으로 생겨났으니 중국에 갈 필요도 없어질 뿐 아니라 원래 신라불국토라는 신라사람들의 체면도 찾게 되었다.


자장은 땅넓히기에 부처님의 원력만으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다. 그의 파발마가 그 몇일 전날 남쪽 신라군의 최고사령부로 달려갔으니 말이다. 자장이 이 아름다운 산을 ‘오대산’으로 명명하는 그날 화랑출신 장수들이 이끄는 신라군은 죽령을 파죽지세처럼 넘어와서 진고개와 동대산 및 두로봉에 이르는 요충지를 점령하였다. 서라벌에서 천리나 북쪽으로 진격한 신라군의 병참선은 길어질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부처의 군대로서 그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했다. 새로이 편입된 땅은 부처님의 처소일 뿐 아니라 경치로도 끝내주는 성스러운 땅인데 이를 신라지도에 추가해서 그려 넣었다는 자부심과 부처님이 그들과 같이 한다는 의심없는 믿음이었다.


(하이맛이 몰래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이때 신라군의 배급은 고구려군이 받는 양의 반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들의 전투능력은 고구려군의 두 배에 달했다고 한다. 그들의 교통로는 백두대간이었다고도 하기에, 1,400년이나 지났지만 하이맛이 목하 수년에 걸쳐 검증 중이라고 한다.)


자장은 지금 월정사 자리에 암자를 짓고 오대산에 늘 나아가 다섯 봉우리(五臺)에 보살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고 말년에는 보살을 친히 만나서 그 꿈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청한 것이긴 하지만 그의 큰 임무는 진부읍에서 진고개를 거쳐 백두대간을 따라 진군하는 신라의 장병들을 독려하는 것이었다.


‘이곳은 신성한 땅이다. 너희는 이 아름다운 오대산을 꼭 지켜내야 한다. 나도 놀지는 않겠다. 늘 기도해 주마.’ 거기다 그는 한마디를 덧붙힌다. ‘살생을 금하라는 게 부처님의 가르침이지만 이미 성지로 판명된 이 오대산을 침범하는 무리에겐 정의의 칼날을 휘두르는 것을 아끼지 말라. 그들의 더러운 피가 우리의 밭고랑을 흠뻑 적시게 하라.‘(이 부분 불란서 국가인 라 마르세이에즈를 패러디했음)


오래동안 국토방위와 불교를 연관시켜온 한국 호국불교의 진수와 시작이 자장에게 있었다. 그는 그 후에도 연전연승하는 신라군을 따라서 계속 신라의 국경을 넓히는 작업에 몰두하게 되며 자장의 뒤를 의상대사가 좇게 되는 것이다. 군종장교가 전투사령관보다 더 높은 안목을 지녔던 신라 때 얘기다.(숨겨진 비밀 하나는 그는 장례법회에도 능하여 전투에서 장렬히 전사한 신라청년들을 극락으로 친절히 안내하였다는 야사도 있다.)


‘문화는 야심에서 나온다’고 에머슨이 말했다는데 신라의 삼국통일은 부처에게 빌어서 되었다고 이 넘은 새삼 주장한다. 그 불교는 신앙심에 불타는 순수한 사람들이 사는 성스러운 땅을 영토로 가지고 있어야 했다. 그런 땅의 중심에 오대산이 있었다. 2월의 어느 일요일 오대산의 그 성스러움 속으로 S산악회 산님들이 들어갔다는 야그다.


2월 25일 일요일이다. 이토록 성스러운 산을 오르는 자들 다 복받은 사람들이다.

10시 35분 상원사앞 주차장에서 산행을 시작하였다.


시작점도 800m가 넘는 고지대인지라 길에는 약간의 얼음이 있다. 싹스리대장이 무전기 남는 것 하나를 왼쪽 어깨에 달아준다. 친구인 시인마뇽에게 주려던 것인데 내 차지가 되었다. 나의 지위가 약간은 격상되는 순간이다.


무전기가 부담이 되기는 하나 남을 이끌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하다. 자장법사처럼 열심히 모범적으로 산행하고 남도 돌보라는 큰 뜻이렸다. 그러나 아쉽지만 다행한 일로 남을 도울 기회는 오지 않았다. 모두들 협조하여 또 하나의 안전산행을 한 날로 기억될 것이다.

 


 

 

10시 59분 중대사자암에 도착하였다. 새로 지은 기와집과 사자상의 조각이 멋있다.


 

 

11시 12분 적멸보궁에  도착하였다. 개국이래 최고의 길지라는데 절집안에서 스님이 한가로이 설법하고 있고 중생들이 기원하며 엎드리거나 서있다. 예불시간인가 보다. 불교법식을 모르는 이 넘은 집뒤의 적멸보궁을 볼 욕심밖에 없다. 늘 크고 유명한 것만 밝히는 하이맛 넘이다.

 

적멸보궁앞의 절집

적멸보궁 : 진신사리를 보고싶은데...

 

시인 마뇽이 촬영한 컷인데 적멸보궁앞에서 진지하게 기원하는 사람들을 카메라에 잘 담았다.

 

 

여기서부터 비로봉까지는 제법 가파른 길인지라 아이젠을 꺼내어 발바닥에 장착했다.

 

비로봉 전의 경사길

 

12시 5분 드디어 오대산 최고봉인 비로봉에 도착하였다. 오대산은 육산으로 그 선이 유연할 뿐 아니라 다섯 개의 봉우리 위가 모두 평평하다고 하는데 우선 비로봉 정상부터 그렇게, 펑퍼짐하게 생겼다. 정상엔 따뜻한 날씨에 많은 산님들이 운집해 있어 사람없는 정상석을 찍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이다. 정상과 주변 산세의 사진을 찍으며 경치도 감상하며 10여분을 보냈다.

 

해발 1,563m 나 되는 비로봉 정상

 

비로봉 정상과 주변

 

 

정상에서 약간 내려가니 곧 헬기장이 나온다. 이곳 헬기장도 다음 헬기장도 다 완만하게 평평해서 후덕한 느낌을 주는 봉우리들이다.

 

첫번째 헬기장도 평평하다.

 

 

12시 21분 제1헬기장 도착.

12시 26분 제2헬기장 도착.

 

제2헬기장부터는 제법 경사가 가파르게 하강한다. 조심스럽게 내려가니 그야말로 걷기좋은 완경사의 길이 나타나고 제법 넓은 길엔 눈이 쌓여 있다. 융단을 밟는 듯 행복하게 전진한다. 또한 주목보호지역에서 주목도 감상하고 자작나무과의 사스레나무들도 지천으로 있어 길이 즐겁다.

 

주목에 주목하라.

 

 

 


자작나무과의 사스레나무군락

 

 

12시 47분 약간의 언덕을 올라가니 상왕봉에 도착한다. 여기서 같이 가던 정병기군과 같이 식사를 하였다. 지나온 비로봉이 건너다 보이고 오대산의 웅장한 산세를 감상하며 식사를 마쳤다.

 

상왕봉 정상 표지목, 해발은 1,491m

 

상왕봉에서 비로봉을 돌아보다.

 

 

식사후 눈이 쌓인 길을 한참 내려오니 오후 1시 20분 경, 임도가 나타난다. 계속해서 직진하면 한참 가서 동쪽으로 우회하는 임도를 따라서 목적지인 상원사로 갈 수가 있다. 그러나 지름길을 이용하기 위해 갈림길에서 우측, 줄로 막아놓은 길로 들어서는데 제법 경사가 급하다.


이 길은 남쪽 사면에 나있는 길인지라 눈이 녹아 질퍽거린다. 이젠 아이젠을 벗어야겠다고 생각하여 아이젠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몇 발짝 내려오는데 진흙에 미끄러지며 발랑 뒤로 자빠졌다. 아픈 데는 없는데 배낭과 바지의 엉덩이에 진흙범벅이 되고 말았다. 미관의 문제가 있을 터, 남아있는 눈(사실은 녹았다 얼었다 하는 얼음)에 엉거주춤 누워서 흙을 씻어내려고 엉덩이를 비빈다. 마침 그곳을 지나가는 여성산님들이 크게 웃어준다.


진흙제거에 쓰인 눈얼음 녹은물이 속옷까지 스며든 줄도 모르고 가파른 경사길을 조심해서 내려왔다.

  

급경사의 소로길로 들어선지 30분쯤 되어 동쪽에서 내려오는 임도와 다시 만났는데 임도는 아직 눈얼음으로 덮여 얼음이 푸석푸석 녹아내리는데다 길의 경사가 완만하여 아이젠까지는 필요가 없다.


완만한 임도를 따라 오다보니 곧 상원사앞이다.

오후 2시 15분 버스에 도착하여 오늘의 산행을 끝냈다. 그러나 성지순례는 계속된다. 식사와 한잔 술을 마치고 두 대의 버스 중 늦게 떠나는 1호차 산님들과 월정사에 들렀다. 여기엔 국보가 하나 있다. 월정사 9층탑으로 고려시대 건립된 아름다운 석탑인데 국보  48호이다. 국보까지 구경했으니 오늘은 본전에서 한참 남는 장사다.

 

 

남는 장사하러 월정사에 들렀더니 국보와 단풍과 적광전으로 명명한 절집이 반겨준다.

 

 

오는 길인 영동고속도로는 사고와 정체로 얼룩져 지루하기만 하다. 잠실에 도착하니 오후 8시 33분이다. 어느새 밤이 되어 잠실 하차지점의 너구리 조각이 영롱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웰컴 투 송백, 심볼인 너구리가 영롱하게 빛난다.

 

-후기-

오대산에 35년전의 각별한 추억을 묻어두고 있는 시인마뇽과 근래의 산행 파트너인 정병기군을 동반하여 오대산트레킹을 무사히 마쳤다. 내게는 자장율사를 다시 한번 생각해 보고 호국의 의미도 논해보는 흥미있고 귀중한 산행이었다. S산악회의 무전기까지 지급받았으니 지도자급으로 부상한 날이었다. 그래서 우쭐한 마음으로 그분께 자랑한다.


‘오늘 제 무전기 찬 모습 폼 났지요? 자장율사처럼 초VIP는 못 되어도 종군장교 정도는 되었지요?’


그분의 냉정하지만 공정한 심판,


‘너의 역할은 백의종군이었다.’

 

(허걱...)

 

 

디지털 카메라와 GPS, 장난감 가지고 산행을 복기해 보는 하이맛, 백의종군하는 김에 구글어스 가지고도 장난을 해 본다. 그래서 몇개의 그림을 만들어 보았다. 하늘에서 보니 정말 오대산의 지형은 오묘하게 생겼다. 월정사가 입구인 호리병이라고나 할까? 전체적으로 분지형태인데 대문에 해당하는 곳이 월정사이다. 신라군을 유인하여 이 호리병 안으로 몰아넣고 주둥이를 막아 버렸다면 이곳을 지키던 고구려군에게도 승산이 있었으리라. 오호라 고구려의 운이 그것 뿐인 것을. 온달 장군은 어디 계셨던가?

 

 

 

그날 걸었던 길의 높낮이인데 전체 길이는 10.7km였다. 

 

-산행기 끝-

 


 

퍼온 글 : SKIP. 읽지 않아도 됨. 자장율사에 대하여 좀더 균형적인 시각을 갖기 원하는 분만 읽을 것


자장율사(慈藏律師) (590∼658)


신라시대의 고승. 성은 김씨, 속명은 선종랑(善宗郞). 무림(茂林)의 아들이다. 무림은 진골출신으로 신라 17관등 중 제3위에 해당하는 소판(蘇判)의 관직에 있었다. 늦게까지 아들이 없었던 그는 불교에 귀의하여 아들을 낳으면 시주 하여 법해(法海)의 진량(津梁)이 되게 할 것을 축원하면서, 천부관음(千部觀 音)을 조성하였다. 어느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석가모니가 탄생한 4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으며, 어버이를 여읜 뒤부터 세속의 번거로움을 싫어 하여 처자를 버리고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조그마한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 움직이기만 하 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였고, 끈으로 머리를 천장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을 물리쳤다. 그때 조정의 재상 자리가 비어 그를 기용하려 하였으나 부름에 응하지 않았으므로, 왕은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는 엄한 명을 내렸다. 그는 칙명을 듣고,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계를 깨뜨리고 백년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吾寧一日持戒死 不願百年破戒而生)."고 하였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뒤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그때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5계를 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636년(선덕여왕 5)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가서, 먼저 문수보살(文殊菩薩)이 머물러 있 다는 청량산(淸凉山)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사구게(四句偈)를 주었다. 아마도 그는 이 곳에 머무는 동안 화엄사상의 묘지(妙旨)를 터득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즉, 이곳 문수보살상 앞에 기도하여 꿈에 얻은 게송이 비로 화엄의 내용을 천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뒤, 중국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당나라 태종은 사신을 보내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하였다. 어느 날 한 장님이 그의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러한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000여명에 이르렀다. 이렇게 그가 당에서 한참 활동하는 시기에 선덕여왕은 자장의 귀국을 정식으로 요청한다. 귀국길에 본국 신라에 불상과 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하였으며, 7년만에 귀국하였다.



그의 생애에서 보다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국민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확립이었다. 어느 해 여름,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 불교는 기강이 세워져 있지 못하였고, 조정에서 대국통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었던 것도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니(僧尼)들을 관장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한편,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꾸었던 원녕사를 다시 증축하고,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법(華嚴敎法)을 천명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門人)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인하여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인물을 자장이라고 보고 있다. 특히, 그는 신라야말로 예로부터 불교와 인연이 깊은 터전이라고 믿었는데, 그러한 불국토사상(佛國土思想)은 <삼국유사>의 여러 곳에 나타나 있다.


저서로는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1 권,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1권, <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갈磨私記)>1 권, <십송율목차기(十誦律木叉記)>1권, <관행법(觀行法)>1권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