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의 동쪽-운길산과 다산 유적지 2009-02-07

2009. 2. 11. 03:37명산산행기 Famous mountains

에덴이라면 한갓 지명일 터인데 그 드라마는 무엇이길래 왜 그리 증오는 불을 뿜는가? 왜 그리 복잡한 설정에 끝없는 사건들로 이어지는지?

 

동쪽이라면 또 한 조각 구석에 불과하거늘 왜 이리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가?

한 때 제임스 딘이라는 잘 나가는 배우가 있었다. 그가 처음 출연한 영화의 제목이 ‘에덴의 동쪽’이었기에 MBC 안방 드라마의 제목도 그걸 베꼈고 제목에서 풍기는 은근한 유혹이 있었으리라 짐작은 된다..

 

에덴은 어디였고 그 동쪽은 또 무어란 말인가? 그럭저럭 족보가 있는 말이렸다. 그분께서 세상을 창조하고 아담과 이브를 풀어 놓았던 멋진 동산이 바로 에덴이었다. 말하자면 낙원 내지는 무릉도원이라고 할 수가 있겠다. 그랬는데 아담의 아들인 카인이 동생 아벨을 질투심에 못 이겨 죽이게 되니 에덴은 피로 물들어 오염되게 된다. 그리고 나서 카인이 도망간 곳이 에덴의 동쪽이란다. 동쪽은 아직 오염은 안 된 곳이었을 터...

 

2월 7일 우리 고교동문산악회는 서울의 동쪽을 찾아 나섰다. 그곳에 숨어있는 카인을 잡으러 간 것은 아니고 운길산에 올라보고 내친김에 다산 정약용 선생의 유적지(생가, 묘소, 마을, 기념관 등이 있음)를 방문하기 위함이었는데. 오염된 서울을 떠나 좀 더 물 맑고 공기 좋은 곳으로 가려는 ‘에덴의 동쪽’ 신드롬 아니었겠는가?

 

전철 중앙선(용산서 청량리 지나 양평으로 뻗으려는 이 선을 이렇게 부르나보다)이 지난해 12월 팔당에서 국수까지 연장되어 중간의 운길산역에서 내려 산행을 하면 운길산에 쉽게 갈 수가 있어 택한 곳이기도 하다. 명색이 산행대장인지라 산행지도라도 프린트하려고 컴퓨터에 앉아 용쓰는데 프린터에 종이가 걸렸다고 하며 인쇄가 안되고 시간만 잡아 먹는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허겁지겁 집을 나선다. 버스정거장에서 또 10분을 허비하고 버스-전철로 회기역에 내리니 9시 10분 쯤인데 국수행 전철이 막 떠나고 있다.

 

10분이나 지나서야 중간역인 덕소행 열차가 오기에 탑승했는데 덕소 전 양정역에서 내려서 기다리라는 방송에 내렸다. 다시 10여분을 기다려서야 국수행 열차에 오를 수 있었고 운길산역에는 약속시간인 10시보다 15분이 늦어서야 도착했다. 국수행열차가 30분에 한 대밖에 없는 걸 간과한 것이 오늘의 패인. 김주홍회원의 부인이신 김여사를 비롯하여 6인이 초조히 기다리고 있다. 미안함이 사무친다. 허지만 어쩌랴. 지각도 병가지상사이거늘...

 

이렇게 하여 10시 30분 쯤 운길산을 향하여 발길을 내딛는 7인의 등산대[김주홍, 김여사, 함기영, 조동식, 오창환, 정병기, 이규성]. 같은 길을 가는 등산객들이 아주 많아서 이곳이 새로운 등산의 명소가 된 듯하다. 전철의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큰길을 따라서 조금 걸으니 길은 곧 산으로 오르는 숲길이 된다. 일렬로 줄을 지어서 오르다 잠시 쉬기도 하며 땀을 내며 산행을 하는데 오른쪽 위쪽으로 수종사 가는 찻길이 보인다. 작년 4월에는 그길로 올랐는데 올해는 오솔길로 해서 가니까 더욱 정취가 있다.

 

몸이 더워짐에 따라 잠시 멈추고 겉옷을 벗어 배낭 틈에 끼운다. 이정표가 잘 되어 있어 산행이 한결 쉬운 듯하다. 해발 610m인 운길산 정상까지 0.9km 라는 목제 이정표가 있는 곳에서 쉬는데 이곳에서 수종사와 정상으로 가는 길이 갈린다. 중론이 수종사를 거치지 않는 길로 가자하여 수종사 관람은 그만두기로 하는데, 오창환회원이 지난 주말 부인과 같이 왔었는데 이곳에서 정상까지 0.9km이지만 길이 험해서 50분이 걸렸었다고 말한다. 이때 일행들이 이구동성으로 50분은 과하고 30분 정도면 갈 수 있으리라고 주장한다. 그랬더니 오회원 말하길 이 구간을 30분내에 간다면 진짜 산악인으로 인정하겠다고 말한다.

 

그래서인지 김주홍회원, 앞장 서더니 쉬지도 않고 정상으로 돌진한다. 뒤에 쳐진 김여사는 돌보지도 않은채로. 나머지 회원들도 30분을 의식해서인지 쉬지 않고 정상을 향한다. 한참을 오르니 헬기장이 나오고 거기서도 쉬임없이 조금 더 오르니 안개 속에 홀연히 정상이 나타난다. 정상에는 목조로 단을 만들고 벤취도 놓아 잘 꾸며 놓았다.

 

시간을 보니 11시 50분경. 먼저 도착한 김주홍회원은 25분 정도에 온 셈이고 나머지 회원들도 30분 안에 주파했다. 오창환회원이 어쩔 수 없이 일행을 진정한 산악인으로 인정하게 될 수 밖에. 남편께서 산악인으로 태어나는 순간인데 김여사는 조금 화나셨다. 뒤쳐진 부인도 챙기지 못하는 판에 산악인 호칭이 대수냐는 말씀이다. 산악인이 되기 전에 인간이 되라는 준열한 심판이긴 한데, 의문사항이 있으면 곧 실행에 옮겨 증명해 보이는 김주홍회원의 실사구시 정신(이것은 그가 실학자 김육선생의 후예이기 때문에 더욱 돋보인다)을 헤아린다면 화를 푸실 수도 있는 일이렸다.

 

정상에서는 여느 때처럼 정상석을 배경으로 사진촬영을 했다. 또한 내가 가져온 복분자주 한 병을 풀어 정상주를 나누어 마셨다. 식사를 하기엔 약간 이른 시간이기에 예봉산쪽으로 향해 등산을 계속한다. 주변에 아늑한 곳이 있으면 식사장소로 잡기로 하고 걔속 가는데 눈앞에 제법 높은 봉우리가 나타난다. 식사후에 넘기엔 너무 높다고 하여 그걸 넘었다. 그랬는데 조금 작지만 또 봉우리가 나타난다. 다시 넘을 수 밖에. 날이 개이고 따뜻하리라는 일기예보가 있었는데 그렇지가 않다. 안개가 축축히 공기를 적셔서인ㄷ지 으슬으슬 추위가 파고드는 날씨이다. 정상도착한 후에는 죽 겉옷을 입은 상태이다.

 

드디어 식사를 할 만한 아늑하고 넓은 장소를 발견하였다. 여느 때처럼 맛있는 식사였고 김주홍회원의 양주로 다시 한번 건배하였다. 이제부터는 별로 힘들지 않은 구간으로 한참을 가니 새재고개에 도착한다. 여기서 오늘의 주요산행은 끝이 난다. 이제 도곡리까지 가면 마을버스가 있고 산행은 끝이 난다.

 

비교적 평탄한 길을 걸어내려오니 버스정류장이 있고 덕소가는 버스가 오후 2시에 있다고 적혀있다. 오후 2시 조금 지나 마을버스를 타고 도심역까지 나왔다. 다시 그곳에서 택시 두 대(대당 만원 지불)를 잡아서 능내리 다산유적지로 쉽게 올 수 있었다.

 

오늘 산행은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운길산을 오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산 유적지를 방문하는 것이었다. 평소에 다산선생 유적에 꼭 가보리라고 생각했는데 이제야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이다. 마을은 강변에 아늑하게 자리잡고 있었는데 생가는 경기형 민가의 평면을 따른 안채와 사랑채로 이루어진 조촐한 규모의 기와집이었다. 집 뒤 제법 높이 솟은 뒷동산에 묘소가 있는데 이곳은 나무가 우거지고 나무사이로 강을 볼 수 있는 경치가 우수한 곳이었다.

 

우선 정약용선생에 대해 [퍼온 글]

정약용 - 조선 말기의 실학자. 호는 다산(茶山)이다. 1789년 문과에 급제하여 부승지 등 벼슬을 지냈다. 문장과 유교 경학에 뛰어났을 뿐 아니라 천문·지리·과학 등에도 밝아 진보적인 신학풍을 총괄 정리하여 집대성한 실학파의 대표자가 되었다.

당시 금지한 천주교를 가까이한 탓으로 좌천되어 귀양을 갔으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목민심서>를 비롯한 10여 권의 책을 저술하였다. 40년 동안을 나라의 정치를 바로잡고 백성들의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방법을 학문적으로 연구하여 많은 저서를 남긴 조선 최대의 정치·경제학자이다. 죽은 후 규장각 재학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주요 저서에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 심서> 등이 있다.

 

우선 기념관에 들러서 선생에 대한 여러 가지 설명문과 책자와 유적들을 볼 수 있었는데 먼저 들어간 기념관에서 나오니 옆에 또 하나의 기념관이 있었다. 집이 좁아서 하나 더 지은 듯 했다. 다산의 업적은 여러 가지 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저술이고 그중 후대까지 이어져야 할 다산정신을 가장 잘 나타낸 책이 목민심서가 아닐까 한다. 백성을 어떻게 섬겨야 할지 요즘의 관리들이 꼭 참고해야할 책이다.[아래는 퍼온 글]

 

목민심서 - 정약용이 전라남도 강진에서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간악하고 교활한 지방 관리들의 고질적인 폐단을 없애고자 조선과 중국의 역사서 등에서 연대순으로 뽑고 분류하여 12편으로 엮었다. 오늘날의 목민관은 물론 모든 정치인들과 일반인들도 교훈으로 삼아야 될 내용을 담았다.

지방 행정제도의 모순과 수령들의 무능, 아전들의 횡포를 직접 체험하게 됨에 따라 진정한 목민관의 자세, 즉 목민관의 행정에 임하는 몸가짐에 대해 논한 율기, 목민관의 올바른 정신 자세를 논한 이전 등 부임에서부터 해관에 이르기까지의 목민관의 생활을 총망라했다.

 

시간이 길지 않아 모든 것을 찬찬히 살펴보진 못하였으나 중요한 사실을 몇 개 알게 되었다. 다산선생처럼 실학을 한 분들을 전시한 파넬들이 있었는데 그중 한 파넬에 오른 분이 대동법을 시행한 김육선생이었다. 알고보니 이 분이 김주홍회원의 선조라는 거였다. 실사구시의 실학자를 선조로 둔 탓에 오늘도 직접 산길을 뛰며 0.9km는 30분이내에 주파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증명하였으니 피는 못 속인다는 옛말이 과녁을 맞춘 것인가?

 

또 한가지 전시된 다산선생의 글 중 중요한 것을 하나 찾을 수 있었다. 김여사가 찾아낸 것인데 선생이 쓴 ‘자찬 묘지명’ 중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눈에 뜨인다는 말씀이었다.

 

‘너야 널리 널리 명예를 날리고 싶겠지만

찬양이야 할 게 없다.

몸소 행하여 증명시켜 주어야만

널리 퍼지고 이름이 나게 된다.‘

 

자화자찬하지 말고 실제 행하여 사람들에게 인정받으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우리들 산악인에게 주는 메시지는 무엇일까? 하고 생각하니 ‘산을 많이 안다하고 떠벌이지 말고 손수 올라서 다른 사람들의 인정을 받아라‘ 하는 말씀 같다. (우연인지 오늘 김주홍회원은 몸소 증명을 실천했다.)

 

기념관을 나오니 다산이 썼다는 거중기가 마당에 전시되어 있고 바로 앞에는 생가가 있다. 생가를 둘러보고 뒷동산의 묘소를 참배했다. 200여년전 한 때를 풍미하고 조선의 천재로서 또한 불운한 정치가로서, 그러나 그 이름은 영원히 남을 참인간으로 살았던 다산선생을 추모하는 마음에 옷깃을 여미게 된다.

 

아직 다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 목민심서도 읽지 못했다. 해설서만 읽었다. 그저 시험공부하듯 여기저기서 선생에 대해 주워 들었을 뿐이다. 다산선생이 이를 안다면 얼마나 한심해 하실까? 선생에 대해 좀더 공부해 보기로 약속하며 마을을 나온다. 마을 밖 매운탕집에서 빠가사리 매운탕을 먹으며 소주잔을 기울였다. 너무 매운 음식이라 집에 오니 속이 아프다.

 

(후기) 에덴의 동쪽이 상상을 따라 서울의 동쪽이 되고, 그곳은 다시 양수리에 가까운 운길산과 다산유적지인 능내리가 되었다. 동쪽에는 정말로 좋은 것들이 많다. 다산선생도 서울 동쪽에 살았고 설악산도 동쪽에 있다. 동이민족은 동쪽에 살았고 달마도 동쪽으로 왔다. 어쨌든 우리는 동쪽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