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2. 16:52ㆍ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7월의 첫 번째 주일날 지리산의 두 번째 구간을 걸었습니다. 지난번 구간이 천왕봉에서 세석까지였고 이번엔 그 다음 구간인데 이어서 세석에서 벽소령까지의 4.5km의 비교적 짧은 구간입니다. 그러나 능선에 오르고 내리기 위해서는 덤으로 15km 이상을 걸어야 했습니다.
보통 하는대로 지리산 종주로 대간길을 마치려면 천왕봉에서 노고단까지 단숨에 걸어가면 됩니다. 그러나 그렇게 보통 사람들처럼 지리산을 이미 넘어 본지라(사실은 노고단에서 천왕봉 방향으로 유평리까지) 그 경험은 마치 지리산을 비행기를 타고 넘은 것 같은 감상만 남아있는 기분이었습니다. 대간길은 갔으되 주마간산의 경치만이 남았던 셈이지요. 지리산구간을 넷으로 나누어서 하루 씩 대간금도 밟고 지능선이나 계곡을 걸으며 지리산과 더 많은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훌륭한 지리산사랑일 것 같습니다.
오늘 산행은 백무동에서 한신계곡을 거슬러 올라가 세석평전 네거리에서 대간금을 만나 우측으로 영신봉을 지나서 벽소령까지 대간금을 밟은 다음 벽소령에서 음정으로 내려올 계획이었습니다. 그러나 날씨가 나빠질 염려가 있어 길이 험한 한신계곡을 거슬러 올라가기 보다는 내려오는 쪽을 택하여 반대쪽으로 진행하기로 합니다. 즉, 산행을 음정에서 시작하여 벽소령에서 대간금에 올라선 다음 세석까지 가서 세석에서 한신주계곡으로 백무동까지 내려오는 것입니다.
전체적으로 보면 지리산자락에서 시작하여 속살을 꿰고 올라가서 등뼈를 만난다음 U 턴하여 가장자리로 돌아 나오는 셈이 되니 지리산의 진수를 맛볼 수 있는 밀도있는 산행이기도 했습니다.
평소보다는 이른 아침 6시 반, 송백의 2호 버스는 잠실벌을 떠나 오늘의 산행지인 함양을 향해 떠납니다. 장마철인지라 날은 어둑 컴컴하고 간간히 빗방울도 내립니다. 그러나 오후에는 날씨가 나아지리라는 예보도 있어 큰 걱정은 안 되었습니다. 8시 40분 인삼랜드 휴게소에 내려 휴식할 때 몇몇분과 인사를 나누었습니다.
버스는 다시 남으로 남으로 달려 10시반이 조금 넘어 산행들머리인 음정에 도착하였습니다. 날은 흐려있으나 비는 오지 않아 다행이었습니다. 90명 쯤되는 산우들은 10시 35분 힘차게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이 힘차고 아름다운 발걸음은 어제까지 쌓인 대도시의 속진을 떨어버리기 위한 몸부림이자 오늘은 지리산의 정기를 한 몸 가득 담아 오려는 결연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오늘 전반부의 산행은 대간금에 도착하기 까지 임도만을 걷게 되어 있어서 조금은 단조로울 것 같았습니다. 시멘트포장길은 얼마 안가서 흙길로 변하는데 비교적 넓은 임도이지만 주변의 나무와 풀과 어루러져 그런대로 흥취가 있는 길이었습니다. 길옆에는 접시꽃, 달맞이꽃, 산수국 등 꽃들이 우리를 반겨주었고 특히 개망초는 너무나도 흔하게 길에 만연하여 산님들을 맞고 있었습니다. 자줏빛의 엉겅퀴도 약간은 불량한 자세로 길가에 서있습니다.
이 길은 능선길은 아니었으나 계곡길도 아니어서 계곡과 능선과 평행하게 가는 7-8부 능선길로 보아야 할 것 같았습니다. 지리산의 높은 고도를 이 길이 채워줘야 하기에 길은 계속해서 경사져 올라가고 있었습니다. 저는 약간 뒤쪽에서 산님들과 가끔 이야기도 나누면서 진행하다가 좀더 속도를 내기 위해 앞으로 나섰습니다. 뒤에서는 건각의 여성 산님들이 계속 압박해 옵니다. 저는 아마조네스에 좇기는 지친 전사처럼 힘들게 경사길을 계속 올라갔습니다.
길가에 꽃들이 피어있는 중에 마침 희게 피어있는 산목련을 볼 수 있었습니다. 평범한 산목련나무는 꽃을 많이 피우지도 못하고 그저 몇송이를 달고 있을 뿐이었고 그것도 비교적 높은 곳에 달려 있어 제손으로 직접 만져볼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동네 고등학교 블록담장 안쪽에 피어있던 후박나무와 흡사하여 매우 반가웠습니다.
작년 4월의 늦은 밤 그 꽃의 향기는 아주 진하고도 달콤했었습니다. 산목련 꽃을 카메라에 담아 보다가 저는 떨어진 꽃잎을 하나 주워서 코에 대어 봅니다. 엷지만 달콤한 향기가 아스라한 추억처럼 제 감정에 파문을 일으킵니다. 산목련나무는 그 후에도 대간길과 한신계곡 하산길에서도 볼 수 있었기에 저의 산행길을 장식하는 추억으로의 단서가 되었습니다.
12시 14분 오른 쪽으로 0.3km 오르면 벽소령대피소로 가는 삼거리에 도착했습니다. 대피소로 가지 않고 임도를 계속해서 갔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관목들이 더욱 무성하여 길을 반쯤 덮고 있었습니다. 쓸모없어진 임도를 그대로 두어서 자연으로 돌려보내는 중이라는 설명문이 보였습니다. 12시 40분 임도를 덮은 나무들을 헤치며 전진하여 결국 대간마루금을 만났습니다.
이곳은 바른재라고도 불리우는 곳으로, 비교적 시야가 확보된 곳으로 산님들이 식사하거나 촬영을 하며 쉬고 있었습니다. 잠시 쉬며 수분을 섭취한 저는 백두대간 마루금을 처음으로 밟으며 세석평전쪽으로 발길을 올겼습니다. 오후 1시가 가까워 오기에 식사를 해야할 것 같았습니다. 덕평봉이 어딘가 있을 터인데 아직 나타나지 않고 오후 1시가 되어 더 이상 점심식사를 미룰 수 없어 길옆의 숲속에 자리잡고 앉았습니다.
김밥과 조각낸 수박, 그리고 물을 섭취하는 데에는 10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일어나서 10여분을 가니 덕평봉이 나오고 선비샘이 나왔습니다. 김대장께서 후미 산님들을 살피기 위해 서있다가 반갑게 인사합니다. 오후 1시 29분이었습니다. 날은 점점 어두워 오며 비라도 뿌릴듯한 태세였습니다. 선비샘에서 수통에 물을 보충하고 김대장에게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길을 떠났습니다. 날렵한 김대장의 모습에서 송백의 아마조네스 이미지를 떠올려 보았습니다.(아마존 밀림 속에 산다는 전설 속의 아마조네스, 그들은 용감하고 날렵한 여성전사들이어서 어떤 남성도 이길 수가 없다고 합니다.)
산꾼들에게 고속도로라고도 불리우는 백두대간길이지만 이 부근의 길은 돌이 비죽비죽 튀어나와 걷기에 쉽지는 않았습니다. 또한 오르내림이 제법 있어서 생각처럼 빨리 진행이 되지 않았습니다. 1시 45분 홀연히 앞에 잘 생긴 나무 하나가 나타났습니다. 나무에 매달린 팻말에 쓰였으되, 사스레나무. 낙엽활엽교목, 높은 산 정상부근에서 자라는 나무. 꽃은 5-6월에 피며 열매는 9월에 익는다. 목재는 건축재, 가구재, 조각재로 이용된다.
사스레나무. 혹시 산에 우리를 묶어 두는 쇠사슬? 무식한 제겐 처음 듣는 이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나무는 사람들이 오기 힘든 높은 산의 꼭대기에 고고하게 자라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그에게 눈길을 주거나 주지 않거나 아무 불평없이 조용히 자라고 있었던 것입니다. 약간은 구부정한 정겨운 모습을 하고서 말입니다. 자연속을 가다 보면 저의 지식이 너무나 보잘것 없음을 늘 느끼고 있었지만 하나 하나 경험하는 작은 사건들이 저의 삶을 조금은 풍요하게 한다고 감히 주장해 봅니다.
오후 2시 2분 경관을 멀리 바라볼 수 있는 망바위에 도착했으나 구름으로 인하여 시계는 약 1km로 제한되어 먼 경치를 감상할 수 없었습니다. 조금 더 진행하여 2시 13분 해발 1,558m의 칠선봉을 만났습니다. 아주 절경이어서 지리10경의 하나인 칠선계곡과는 제법 떨어진 이곳이 왜 칠선봉인지 궁금했습니다. 칠선봉표시 이정표와 그옆의 바위를 카메라에 담은 후 오늘의 최고봉 영신봉을 향했습니다.
오후 2시 34분 영신봉으로 오르는 첫 번 째 나무계단에 도착했습니다. 3년전 지리종주 때 이곳 계단이 특히 힘들었던 기억이 났고 또한 이 계단이 나오면 영신봉이 멀지 않았던 것이 생각났습니다. 나무계단은 철계단으로 변하는데 힘든 길을 몇 번 쉬면서 계속 올라가 바위위에 섭니다. 주변은 구름에 싸여 산능선들이 희미하게만 나타납니다. 비도 올 것 같았습니다. 저는 홀로 나그네되어 구름속을 운행합니다.
오후 2시 55분 드디어 오늘의 클라이맥스인 해발 1,651.9m의 영신봉에 올랐습니다. 구름이 끼어 시계는 불과 수십미터에 못 미치고 있었습니다. 바람은 알맞게 불어 땀이 난 몸을 식혀주고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고도를 낮추어 내려가게 되니 오늘 산행의 고비는 넘긴 듯 했습니다.
영신봉에서 동쪽으로 조금 가니 세석평전이 나오고 3시 5분 세석평전 네거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직진하면 천왕봉이고 우회하면 세석산장인데, 저는 좌측으로 꺾어서 백무동으로 내려가야 합니다. 운무는 아직도 조화를 부려 넓디넓은 세석평전을 감상할 수 없게 합니다. 저는 하릴없이 발걸음을 한신계곡쪽으로 향해 재촉합니다. 여기서 백무동까지는 6.5km라고 이정표가 말해 줍니다. 내려가는 길은 돌길인데 제법 가파르게 나있고 돌이 안개에 젖어 조심해야 합니다.
계곡은 나무들로 가리워져 제법 컴컴합니다. 안경에 서리는 김을 닦아가며 약 20분을 내려가니 계곡의 물소리가 들리기 시작합니다. 길옆의 계류는 돌 위를 빠르게 흐르고 바위에는 시퍼런 이끼가 끼어 있어 이곳이 공해에 물들지 않은 곳임을 알게 합니다. 날은 점점 더 캄캄해집니다. 앞에간 산님들도 뒤에 오는 산님들도 보이지 않는 혼자만의 외로운 산행입니다.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우선은 비옷을 입지 않고 버티어 보기로 합니다. 미끄러운 너덜길을 계속해서 내려갑니다. 아까 보았던 산목련이 반갑게도 다시 나타납니다. 약하게 내리던 이슬비가 차차 굵어지는 것이 이제 본격적으로 비가 내릴 것 같습니다. 배낭속에서 우의를 꺼내어 입고 배낭을 커버로 덮습니다. 본격적인 우중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골짜기는 어둑컴컴하고 빗소리와 계곡의 물소리가 귓속을 채우는데 안경에는 김이 서려 미끄러운 길이 분간이 잘 안됩니다. 그러나 여기서 멈춰 설 수는 없는 일, 안경에 서린 김을 손수건으로 닦아가며 그럭저럭 잘 내려갑니다. 구약성서의 시편 귀절이 떠올려졌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다닐지라도 내가 해를 입지 않을 것이며.....’ 여느 때처럼 그분의 임재를 요청해 보았습니다.
비옷으로 무장하고 올해 들어 처음으로 본격적으로 비와 맞서려는 의지를 보였는데 빗발은 약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우의착용이 한 시간도 안 된 것 같은데 비도 그치고 우의 내부의 몸도 더워져서 우의를 벗어서 배낭속에 넣었습니다. 거추장스러운 차림도 그만두고 비도 그쳐서 이제 운행은 한결 쉬워졌습니다. 경사지를 급히 쏟아져 내리는 계류는 그 양이 풍부한지라 웬만한 곳은 모두 폭포수처럼 보여 장관이었습니다. 몇 개를 카메라에 담으며 진행합니다.
산행지도를 꺼내어 폭포들의 이름과 위치를 맞추어 보아야 했지만 그만두고 계곡 전체가 폭포로 되어있다는 생각만 하기로 했습니다. 거무스레한 바위와 그 위를 힘차게 구르며 떨어지는 물줄기, 수량이 풍부한 여름 계곡의 장관이었습니다. 귀를 찌르는 물소리에 떠밀려 조심스레 미끄러운 돌길을 내려오고 또 내려옵니다.
드디어 4시 48분 가내소폭포에 도달합니다. 안내판에 설명문이 있기에 가내소인 줄 알 수 있었습니다. 가내소폭포는 나무에 가려서 그 전경을 보기가 힘들었지만 수량이 제법 풍부하여 흐르는 물소리가 요란했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길도 잘 정비되어 있어 걸음을 빨리 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계류를 몇 번인가 건너는데 구름다리를 설치해서 편리했고 그 위에선 계곡을 잘 감상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빠른 걸음으로 백무동매표소를 향하여 매진합니다.
오후 5시 35분 드디어 식사와 버스가 기다리는 본부에 도착하였습니다. 산행시작 후 7시간 만이었습니다. 오늘의 산행은 구름과 안개로 지리산의 원경을 감상하지는 못했으나 나무, 풀, 물, 그리고 돌과 저의 몸이 밀착하여 진행하는 지근거리의 감흥을 즐기는 산행이 되었습니다.
날씨가 맑으면 산과 계곡은 햇빛아래 납짝 엎드려 먼 경치를 즐기게 해 줍니다. 반면 날이 흐리면 산과 구름과 바위는 습하고 날카롭게 살아나서 우리에게 위협적으로 크게 닥아오고 몸으로 부딪히는 산행을 요구합니다. 이 날은 산이 힘이 세고 커 보이는 그런 날이었습니다.
저는 식사를 맛있게 하고 다행히 2호차에 탑승할 수 있었습니다.
(본문에 나오는 경치감상을 위해서는 후속으로 올리는 사진산행기를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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