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2. 16:54ㆍ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장마의 한가운데입니다. 토요일(7월 15일) 저녁부터 내리는 장마비는 그의 힘과 소리로 잠을 설치게 하며 일요일 새벽까지 계속 내리고 있습니다. 새벽 4시 30분, 백두대간 가는 날인데 아직도 비가 주룩주룩 내립니다.
‘이렇게 비오는 날도 꼭 가야하나?’ 강원도지방엔 수해가 나서 심각한 상태라고 합니다. 제가 갈지 말지를 결정해야 할 순간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산행한다는 송백의 결의가 생각났습니다.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강한 전통은 누가 만든 것인지? 저도 그 흐름에 합류하기로 마음먹고 자리를 차고 일어납니다.
잘하면 오늘 산행지인 지리산에서 빗속의 절경을 또 한 번 볼 수 있다는 욕심도 한 몫 거들었다고 보아야겠습니다. 그러나 또 한 가지 내면에서 스멀거리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오늘 비와 맞장뜰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뭔가 끝장을 보려는 반역의 생각이었습니다.
5시 반, 배낭에 커버를 씌우고 우산을 들고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데 빗줄기가 제법 실하게 내립니다. 황산벌전투에 나가는 계백장군은 아니지만 스스로의 결단에 제법 비장감마저 느껴봅니다. 잠실대교를 넘어 고층아파트앞 버스정류장에 내리는데 빗줄기는 아직 약해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송백호 버스로 가려면 지하도를 통과해야 합니다. 비인간적으로 너무 넓은 네거리가 싫습니다.
가까운 지하도 입구가 공사로 막혀있어 잠깐 당황하였습니다. 우산을 썼음에도 배낭에 떨어진 빗물이 엉덩이로 쏟아져 내립니다. 바지속이 벌써 축축해집니다. 아직 우의를 걸친 상태는 아니지만 비의 세기에 순간적으로 당황할 수 밖에 없엇습니다. 비와의 대결은 이미 시작인가 본데 초장부터 비에 밀리는 기분입니다. 세찬 빗속에서 겨우 그 옆의 다른 지하도 입구를 찾아 롯데호텔쪽으로 건너 갔습니다.
시간이 벌써 6시 20분에 육박한지라 3번 출구를 바삐 나가 송백호 버스로 달려갑니다. 1호차는 이미 어느 정도 만석이라서 2호차로 안내를 받아 승차하였습니다. ‘버스가 2대나 뜨게 되다니...대단한 산꾼들이다. 비와 대결하는 재미를 아는 사람들이 이리도 많은가?’
6시 30분 빗줄기를 뚫고 버스는 오늘 산행지로 향합니다. 하남 만남의 광장에서 돌백이하 7-8명의 여러 산님들을 더 태우고 남으로 내달립니다.
미리 송백에서 안내하기를 오늘의 산행은 천후문제로 지리산입산이 금지될 경우, 원래의 산행지인 지리산 3구간[벽소령->화개재->뱀사골]에는 못 갈 수가 있고 대체지로서 함양ㆍ장수의 백운산->영취산을 간다고 되어 있었습니다. 호우주의보와 호우경보가 여기저기에 발령되어 있고 지리산엔 입산이 불가할 것 같아서 백운산으로 산행지를 바꾸어야 할 것 같다는 회장님 말씀에 다들 약간은 실망감을 느끼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안전을 생각해야지요. 지리산의 절경을 못 보는 것이 섭섭했지만 수용해야 했습니다.
‘꿩대신 닭인가?’ 이렇게 이야기하면 백운산이 섭섭할 것 같았습니다. 백운산도 족보에 있는 좋은 산인 것을. 빗속에 차분하게 걷기에는 오히려 더 나을 듯 하게 여겨지기도 했습니다. 그 동안 운이 좋아서인지 백두대간길에 세찬 비를 뚫고 산행한 적은 없었습니다. 어쩌면 오늘이 그날이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비와 공존하기 보다 대결한다는 반역의 생각을 더 키웁니다.
억센 빗속의 운행, 차라리 맘속에선 그걸 바라고 있었습니다. 제자신을 시험해 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과연 얼마나 견딜 수 있을런지요. 비와의 대결에서 잘 견디어 내서 역설적이게도 ‘비오는 날이면 백두대간에 가야 한다.’라는 명제를 증명해 보이고 싶어집니다.
‘비오는 날이면 백두대간에 가야 한다.
비에 젖어 물오르는 백두대간을 걸어야 한다.
비와 내가 딩굴며 하나 되리라.
인생... 한 때 비오는 날 있으나
비 안 오는 날 더 많거늘
비오는 날엔 백두대간에 가야 한다.’
(인생까지 동원하고 나니 무언가 멋진 시가 될 것도 같으나 둔한 머리엔 여기까지였습니다.)
(거기 가면 억센 비가 내 머리를 때리고 내 온몸을 적실지라도 나는 불평하거나 울지 않으리. 대간길에 미끄러져 진흙탕에 구른다 해도 나는 멈추지 않으리. 어쩌면 억센 비를 내가 길들일 수도 있으리. 이렇게 써나가면 멋있는 시가 될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은 비가 죽나 내가 죽나 대결하고픕니다.)
(제 주장의 요체인 즉, 비오는 날은 삶이 비교적 단순, 무식, 순수해져서 귀중한 날이 온 거니까 귀한 보석과도 같은 백두대간에서 비를 만나러 가야 한다. 뭐 이런 이야기로 가려고 합니다.)
버스가 전라북도 장수에서 고속도로를 내려와 오늘의 들머리인 지지리로 가는데 길이 좁고 굽어진데다 오르내림이 있어 천천히 갈 수 밖에 없습니다. 차가 속도를 줄이니까 덩달아 하늘도 브레이크가 걸린 듯 비가 내리지 않았습니다. 다행입니다. 그러나 결연히 비를 헤쳐가겠다는 의지에겐 아쉽습니다. 비와 저와 대간이 섞여서 사투를 벌이는 그런 날은 아닐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래도 이제 시작이니 좀 더 두고 볼 일입니다.
10시 35분 버스가 더 이상 갈 수 없는 터널공사장 앞에 멈추었습니다. 모두들 버스를 내려 산행준비에 바쁩니다. 우선 개울을 건너 풀숲에 덮힌 길을 따라가기 직전인데 잠잠하던 하늘에서 비가 갑자기 흩뿌립니다. 비옷을 꺼내 입어야 할 정도였습니다. ‘초장부터 우중산행인가? 그것 잘 되었다.’ 우의를 꺼내입고 선두를 바삐 따릅니다. 배낭커버와 우의에 떨어지는 빗소리가 산뜻하고 시원한데 몸속에선 열이 올라오며 땀이 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안경에 김까지 서립니다. ‘이래선 안 되는데...’ 이런 상태론 오래 지속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큰소리는 어디로 갔는지 모르겠습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 10분 가니까 비가 약해집니다. 그래서 우의의 앞을 벌려서 반쯤만 걸친 채 진행을 합니다. 열기가 빠져 나가서 좀 낫습니다.
11시 29분 약간 움푹한 안장과 같은 안부인 중고개재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부터는 좀더 경사가 가팔라지기 시작합니다. 아마도 좀 급한 비탈길이 백운산까지 이어질 것 같습니다. 조금 더 걷다가 비옷을 아예 벗어서 배낭과 몸 사이에 끼웁니다. 비는 약하거나 간간히 흩뿌릴 뿐입니다. 이상하게도 오늘 비는 초장부터 저에게 화해의 악수를 청하는 것 같습니다.
(산행하면서 빗발이 세지면 우의를 입고 약해지면 벗기를 4번 이상 하였습니다.)
나무들은 빗속에 함뿍 물을 먹고 즐거워하는 것 같습니다. 보통 때보다 색깔이 더 진하고 생생합니다. 산에서는 쉴새없이 허연 김이 나는 것처럼 개스가 날립니다. 그 길을 송백의 마사이 전사들과 아마조네스들이 진군합니다. 다들 걷는 걸 즐기는 것 같습니다.
개스가 휘날리는 그날의 산길
백운산 정상까지만 가면 오늘 산행의 어려운 과정은 끝날 것 같아 쉬지 않고 가려 하나 숨이 차고 목이 말라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돌백과 같이 온 분들을 중간에서 만나 그 뒤를 따라 백운산 정상까지 가는데 주변 경치는 나무들 뿐, 먼 경치는 구름에 싸여 감상할 수가 없었습니다. 정상까지 전망포인트가 두군데 정도(8부능선쯤에 하나, 정상 직전 100m 앞에 하나) 있었지만 보이는 것이라곤 운해雲海 뿐이었습니다. 맑은 날이면 지리산의 연봉들과 좌측으로 장안산이 보일 것인데 아쉬운 일이었습니다.
오후 1시 드디어 1,278.6m의 백운산 정상에 도착하였습니다. 시계는 제한되어 있고 공중에는 습기먹은 구름만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고지대인지라 공기는 제법 차고 시원했습니다. 정상을 알리는 이정표말뚝에는 ‘수고하셨습니다.’라고 세로로 적혀 있고 그옆에 작고 둥그스럼한 정상석이 서 있습니다. 이곳 정상에서 남쪽으로 지리산쪽 경치를 조망할 때 여러 산봉우리들을 구별해 주는 경관설명판도 서 있었습니다. 그러나 천왕봉이하 토끼봉까지 11개 봉우리가 안내판 그림에만 있고 구름에 가려서 실제 경치로는 볼 수가 없습니다.
여기서는 또한 서쪽으로 비슷한 높이의 호남정맥줄기에 있는 장안산이 보여야 하는데 이 또한 장마철의 핸디캡 때문에 직접 볼 수가 없습니다. 장안산은 해발 1,236.9m로서 백운산보다 41.7m 밖에 낮지 않은 산으로 호남정맥의 초입에 있는 산입니다. 백두대간은 조금 후에 오를 영취산에서 서남쪽으로 가지를 쳐서 장안산을 지나 남쪽으로 뻗어갑니다. 장안산은 제가 수년전 등산해 본 산이라서 여기서 눈을 마주친다면 더욱 반가웠을 터인데 아쉽습니다.
날이 개였더라면 보였을 서쪽편에 있는 장안산의 실루엣(4월 23일 촬영)
백운산 산정에서 돌백님 팀과 같이 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제법 된지라 밥이 꿀맛입니다. 막걸리와 맥주도 조금 얻어 마셨습니다. 쳐올라오는 산행이 끝난 뒤이고 앞으론 비교적 쉬운 길이라서 약간은 마음이 홀가분하였습니다.
오후 1시 13분 정상을 내려서서 영취산을 향해 산행을 시작합니다. 떠난지 1분도 안되어 비탈을 내려서는데 빨간 나리꽃 몇 송이가 반겨줍니다. 온통 초록빛깔 속의 붉은 빛이라니요, 의외의 볼거리였습니다. 그런데 후두득거리며 또 비가 뿌리기 시작합니다. 아까처럼 우의를 꺼내어 입었습니다. 한참을 더 가는데 산죽밭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비는 제법 세차게 내려 아직 젖지 않았던 신발속까지 적셔버립니다. 바야흐로 비와의 동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비와 맞닥드리니 기쁩니다. ‘좀 더 계속해다오. 이 산이 떠내려가도록...’
길 양옆을 덮고 짙게 자란 산죽은 키가 2m 정도가 되는 곳도 많았는데 사람이 그 속에 들어가면 앞이 잘 안 보일 정도로 키도 크고 밀도도 높았습니다. 앞에서 누군가 오면 부딪힐 우려도 있는데 특히 비가 내리는 지금은 더 그렇습니다. 조심조심 비와 산죽을 헤치고 약 10분 운행하니 산죽밭이 끝납니다. 그리고 비도 다시 약해집니다. 화해인가요? 변덕인가요? 변화무쌍합니다.
조금 더 가니 헬리포트처럼 생긴 개활지가 나오기에 잠시 쉬며 물을 마셨습니다. 맑은 날이면 앞쪽으로 뾰족한 영취산의 모습이 보이고 뒤쪽으로 백운산의 완만하게 솟아오른 산괴가 수려하게 나타날만한 지점입니다.
날이 개였다면 보였을 영취산의 뾰족한 봉우리(4월 23일 촬영)
날이 개였다면 보였을 백운산의 육중한 산괴(4월 23일 촬영)
약해졌지만 비가 오락가락하기에 비옷을 입은 채 진행합니다. 오후 2시 17분 좌측으로 0.7km 전진하여 무령고개로 갈 수 있고 직진하면 0.4km 지나서 영취산에 오를 수 있는 삼거리에 도달했습니다. 이제 산행도 거의 종점입니다. 각오했던 비와의 만남도 너무나 싱겁게 끝나나 봅니다. 제법 가파른 길을 올라선 다음 약간 완만해진 길을 10분쯤 가니 해발 1,075.6m의 영취산 정상이 나옵니다. 호남정맥이 백두대간에서 분기되는 중요지점입니다. 잠시 휴식하며 촬영을 하나 먼 경치는 역시 오리무중입니다.
지금 시각이 오후 2시 30분, 산행시간으로 네시간도 채 안되었습니다. 북쪽으로 7.5km 떨어진 깃대봉까지 내쳐 가서 깃대를 꼽고 싶습니다. 그러나 인생만사 맘대로는 안 될 일, 정해진 계획표에 따를 때입니다. 좌로 돌아 무령고개를 향해 가파른 길을 내려갑니다.
거의 다 내려왔는데 길이 질고 미끄럽습니다. 주의한다고 했는데 주르륵 미끄러지며 우의를 입은채 살짝 넘어졌습니다. 우의 왼쪽 아래로 진흙이 묻었습니다. ‘그래! 인생만사 맘대로는 안 될 일, 넘어질 땐 넘어져 주어야지.’ 조금 내려오니 벽계쉼터가 나오고 거기 샘이 있어 신발과 우의의 진흙을 다 씻어냅니다.
오후 2시 40분, 무령고개 주차장에 설치된 송백본부에 도착한 시각입니다. 4시간의 짧은 산행이 끝나고 육계장으로 식사, 2호차로 서둘러 상경했습니다.
[후기]
흩뿌리는 빗속에 대간길을 걷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습니다. 나무들은 빗속에서 더욱 녹색으로 우거지고 새소리도 들렸습니다. 능선을 넘나드는 바람은 땀을 식혀주었습니다. 숲으로 ‘쏴아’하고 떨어지는 빗소리는 경이로움을 안겨 주었답니다.
장마의 한 가운데, 저 나름대로 비와 일전을 각오하고 산행에 참여했었습니다. 백두대간이라는 무대에서 비를 만나면, ‘비! 너 딱 걸렸어.’하고 외치면서 죽기 살기로 뒹굴어 보려고 맘속으로 별렀지요. 그러나 오락가락하는 빗속에서 비와의 대결은 미수에 그치고 진흙만 묻혔답니다.
저는 할테면 해보자고 날을 세웠지만 그분께서는 부드러운 화해의 손짓으로 저를 인도하셔서 비를 걷우어 가셨습니다.
그분의 부드럽지만 질책하는 음성,
‘하이맛아! 만용을 부렸었구나. 비는 더 내릴 수 있었다.’
견딜만한 시련만 주시는 그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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