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새벽의 카타르시스

2007. 11. 16. 09:04명산산행기 Famous mountains

10월 26일 아침입니다. 이곳 연하천에서 반야봉은 아직 안 보이는 건가요? 비가 그친 지리산의 아침은 노곤하고도 신선합니다. 나는 비틀비틀 침실로 쓰는 대피소를 걸어나와 서쪽 하늘을 쳐다 보았죠. 반야봉은 아직인가 봅니다. 길을 떠나면 결국 만나게 될 것이니 조바심을 놓아야겠군요.

조금 전 아득하게 골아 떨어졌던 잠에서 갑자기 무엇에 놀란듯이 잠이 깨고 말았습니다. 공기는 습기를 머금고 눅눅한데 여기저기서 소리를 내고 있는 산객들의 콧소리와 얕은 잠꼬대로 산장안은 살아 움직이고 있어서 커다란 고래의 뱃속에라도 누워있는 듯합니다. 플래쉬를 살짝 켜 시계를 보니 벌써 3시 반입니다. 5시 반에 떠나기로 계획이 되어 있지만 잠이 더 올 것 같지 않아 부시시 일어나 앉습니다.

옆에서 자고 있던 동료들도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말을 걸어옵니다. 일어나자고 권하고 우선 날씨부터 첵크합니다. 다행히 비는 그쳤고 기온도 그리 내려가지 않아 어제 비를 맞고 산행했던 고행은 다시 반복되지 않을 듯 싶습니다. 동료들이 두런두런 산행계획과 날씨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한 산객이 잠을 못자겠다고 불평을 합니다. 우리들이 코를 골아서 잠을 설쳤고 또 아침부터 떠들어서 못 잤다고 합니다. ‘그럴려면 자네 집에서 자지 왜 여길 왔느냐?’고 면박을 주고 싶지만 참습니다. 조용한 게 좋을 것 같아서 참는 겁니다. 물론 그 평화가 앙금이 밑에 깔린 조금은 불편한 평화이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취사장으로 갔습니다. 물을 끓여 1차 가공된 레토르식품에 부을 준비를 하고 커피물도 마련합니다. 동료들이 준비하는 동안 취사장 밖을 나가보니 서녘으로 달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다 개인 것은 아니나 잠시 달이 구름밖으로 나와 무슨 계시라도 주듯이 빛을 발하고 있는 것입니다. 노오란 빛을 띠고 밝게 빛나는 달을 보자 영상에 대한 욕심이 듭니다. 작은 카메라를 꺼내어 몇장 찍어 보지만 별 그림이 안 나옵니다.

부랴부랴 배낭속에서 큰 카메라를 꺼냈다. 그러나 이번엔 노출부족이 문제입니다. Aperture Mode 에 놓고 보니 30초가 필요하다고 하네요. 아픈 어깨를 달래며 두 팔로 카메라를 받치고 셧터를 눌러보나 역부족입니다. 찍힌 상을 보니 흔들린 이미지들만 나옵니다. 몇 번을 씨름하는 중에 달은 구름속으로 들어가 버립니다. 매우 고혹적이고도 지리산의 새벽을 표현하는 멋진 풍경인데 카메라에 제대로 담아보지 못하니 아쉽습니다.

삼발이(Tripod)를 가져 왔다면 좋았을 것이나 산행에는 언감생심 엄두를 낼 수가 없습니다. 카메라와 렌즈 무게가 1.5kg 이 되는데다가 삼발이 무게는 1.6kg 이나 나가기 때문에 장거리산행에는 물론 1일 산행에도 동원해 보지 못했습니다.(사실 그때 ISO를 늘 사용하던 100으로 하지 않고 1600이나 3200으로 올려서 찍었다면 괜찮은 놈이 찍혔을지도 모르는데 그 전날 꽤 고생을 하며 산행을 해서 그런지 머릿속에 그런 생각은 전혀 떠오르지가 않았습니다.)

만약 산행의 속도를 줄이고 목표를 낮추어 잡으면 괜찮은 사진촬영이 기능할 터이나 아직은 산에서의 긴장감을 줄이고 싶지는 않습니다. 산행에서의 긴장감이라면 가능한한 쉬지 않고 산행을 하는 버릇입니다. 몇 년 전에는 특히 혼자서 질주하는 그 버릇이 심했었지요. 그래서 Mt. 우와 둘이서 안내산악회를 따라서 백두대간길을 갈 때면 (버스가 3대나 가기 때문에 산행이 끝난 순서대로 타고 귀경할 수 있기에) 답답증에 시달리던 저는 늘 친구를 버리고 앞차에 타고 먼저 돌아오곤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후 여러 사람들과 같이 산행을 많이 하게 된 후로는 저의 서두르는 버릇은 많이 줄어 들었습니다. 그래도 혼자 산에 갈 때는 자주 이 버릇이 나오곤 하는데 운동을 열심히 한다는 좋은 쪽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달을 찍느라 부산한 중에 밥이 다 되었습니다. 간단한 식사이지만 입맛이 납니난다. 이제 곧 지리산의 품으로 다시 안길 생각에서인가 기대감이 서서히 솟아오르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은 구름속에 숨은 달처럼 마음의 창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준비가 끝난 우리는 5시 10분에 반야봉을 향해서 출발했습니다. 사실 어젯밤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고 있었기에 반야봉등정이 불가능해 보이기도 했었지요. Mt. 우 이하 대원들의 실망은 대단했었습니다. 나로서는 이미 반야봉에 두 번이나 올랐었기에 날씨가 안 좋으면 그곳에 오르지 않을 수도 있다고 생각 했지만 나머지 세 사람 모두 이전에 반야봉을 먼발치에서만 구경했다기에 어제 밤 그들이 느꼈던 안타까움은 매우 컸으리라고 짐작됩니다.

사실은 저 자신도 반야봉에 가길 절실히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곳에 가야만 그분을 만날 수 있고 구원이 완성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분과 그곳에서 만나기로 마음 속으로 약속을 했던 것입니다. 해가 뜨는 6시반 전에 그곳에 도착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우리 계획으론 그 시각에 그곳에 가는 것은 불가능한지라 아침 9시경으로 약속을 잡았던 것입니다. 그분은 아무 곳에나 아무 때나 계시지만 구원의 상징인 반야봉에서 만나 뵌다면 더욱 의미가 있고 그분이 주는 메시지도 더욱 절실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해발 1,500m의 연하천 대피소에서 서쪽으로 진행하는 길은 서서히 고도가 상승하는 길인지라 조금 힘을 들여가며 진행을 합니다. 그러나 길이 좀 좋지가 않습니다. 발밑에 돌이 깔려 있는데 깔린 상태가 가지런하지 못하여 조심하느라 속도를 낼 수가 없습니다. 그래도 서중원군과 정병기군은 잘도 앞장 서서 가버렸습니다.

Mt. 우와 저는 랜턴을 켜고 힘겹게 돌길을 헤쳐 나가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위로만 치솟던 길이 아래로 다시 하강하는 중인데 갑자기 서쪽이 환해지며 노오란 빛을 띤 달이 구름 속에서 모습을 나타냅니다. 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은 나는 Mt.우를 불러 세웠습니다. 달빛에 비친 산을 사진으로 담는 동안 기다려 달라고 부탁합니다. 친구에게 조금 쉬라고 부탁한 다음 배낭속의 큰 카메라를 다시 꺼내어 조심스럽게 달을 향해 셧터를 몇 번이고 눌러 봅니다. 사진보기를 눌러서 찍힌 이미지들을 보니 다행히도 한두 장은 괜찮게 찍힌 것 같습니다.

서방정토를 환히 비추고 있는 저 달은 반야봉 쯤에서 우리를 기다리는 듯합니다. 지리산의 새벽공기는 차고 저의 몸은 어제의 과도한 운동으로 조금은 혹사되어 있지만 저의 마음은 무언가 모를 희망에 진저리치고 있습니다. 저의 가슴속에서 방망이치고 있는 이 희열의 정체는 과연 무엇일까요? 이게 바로 위대한 예술작품들이 무딘 자들에게도 베풀어 퍼준다는 그 카타르시스인가요?

이 새벽은 저에게 어떤 의미를 띠는 것인가요? 그렇습니다! 저는 살아있고 실재합니다. 희망은 서쪽에 있고 몸은 아직 동쪽입니다. 그러나 곧 그 평화로운 언덕에 도달하리라 기대합니다. 구원은 그 언덕에 있으며 또한 이미 여기에, 제가 서있는 곳에 있습니다. 분위기에 편승하여 억지로 만들어 낸 감격인지도 모릅니다. 그래도 그 감격에 취할 만큼 저는 아직 순수합니다.

[사진 두 장을 실어봅니다. 첫 번째 사진은 가공하지 않은 달과 주변의 이미지인데 조금은 흔들려서 아쉽습니다. 두 번째 사진은 뽀샵(Photoshop)을 써서 이미지들을 합성한 것인데 장난이 좀 심해서 희화화된 감이 없지 않습니다. 지난 9월과 10월에 소위 뽀샵 프로그램을 두 달 간 공부해 보았는데 이제 사진들 가지고 장난하는 데에 익숙해져 버렸나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