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머나먼 샘 연하천

2007. 11. 16. 08:49명산산행기 Famous mountains

지리산 정상에 선 자는 누구든 지리산 연가를 불러야 합니다. 연가라고 해서 일정한 노래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차라리 누구든지 느끼는 정상에서의 벅찬 감회 때문에 생기는 가슴속에서 자연스럽게 솟아나는 감정의 용솟음이자 내재율이라고 해야겠습니다.

천왕봉 아래로 도열하여 장엄하게 펼쳐진 파노라마 경치를 보노라면 가슴에 맺히는 뜨거운 것을 주체할 수 없어 누구나 시인이 되고 노래하는 자가 되기에 충분할 것입니다. 이때 터져나오는 자연스러운 노래를 저는 지리산연가라고 불러 본 것입니다.

그 노래는 뜨겁고도 진하고 황홀하지만 자기 내부로만 흐르고 있기에 아무도 눈치 못채는 그런 노래이고 지리산에 오르는 자들은 누구나 자연스럽게 터득하는 매혹적인 노래랍니다.

제 가슴 속에서 스며나오는 열정은 뜨거웠지만 천왕봉 정상에서의 기온은 식어가고 있었습니다. 변화는 급격했습니다. 정상에 오른 순간에는 구름은 끼었어도 바람이 없던 날씨가 이제 바람을 불어대고 이슬비까지 뿌리기 시작합니다. 조금 늦게 우명길군과 정병기군이 도착하자 기념사진을 서둘러서 찍은 다음 준비했던 맥주를 꺼내어 셋이 한 모금씩 나누어 마시며 정상주로 가름합니다.(서중원군은 약을 복용하는 관계로 노탱큐) 복숭아 통조림도 하나 꺼내어 식사하여 무게를 줄여 봅니다. 올라오는 길에 우유도 마셔 버려 이제 다행히도 약간은 짐이 줄은 듯 합니다.

일행은 짙게 구름이 드리운 서녘하늘을 보며 아쉬워 합니다. 맑은 날이면 저 멀리 노고단과 반야봉이 선명하게 보여야 할 기막힌 장소에 서있지만 부슬비만 앞을 가리고 뿌려댑니다. 우비를 꺼내 입고 점심식사를 할 다음 목적지인 세석대피소를 향하여 출발했습니다. 세석에 가기 전에 우선 장터목을 거쳐야 합니다. 비에 젖어 돌이 깔린 길을 가는데에는 조심을 해야 합니다. 정상을 조금 내려와 조금 가니 지난 5월에도 통과했던 통천문이 맞아줍니다. 다음은 옛날에 불이 났던 흔적이 있는 제석봉 부근의 고원지대를 통과하며 한 시간쯤 걸려 9시반 쯤 장터목대피소에 도착하였습니다.

비가 계속 내리기에 장터목대피소의 취사장에 들어가 간식을 꺼내어 먹었습니다. 아침을 새벽 2시에 먹은지라 여기서의 영양공급은 적절한 듯 했습니다. 다시 장터목을 나와 비가 오는 산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중식장소로 정해져 있는 세석대피소를 향해 네사람은 걸음을 재촉합니다.

길은 비에 젖어 미끄럽고 오르내림이 심해도 지리산을 종주하겠다는 의지 앞에는 거칠 것이 없는 듯 했습니다. 원래의 일기예보대로라면 비가 오지 말아야 했지만 하늘이 하는 일을 인간이 말릴 수는 없는 일이었습니다. 연하봉을 지나고 삼신봉을 지나자 드디어 촛대봉 옆에 섰습니다. 어기서 세석데피소는 바로 코앞이고 맑은 날이면 빤히 내려다 보이는 곳이지만 지금은 비가 내리는 날씨인지라 대피소 건물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11시 반이 좀 지나 드디어 세석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건물 아래의 피롯티 부분에 자리잡고 앉아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자리를 잡고 보니 바람이 불어와 추위를 느끼게 되니 취사장 안에 자리잡지 않은 것이 후회되었으나 중간에 자리를 옮기기도 무엇하여 그대로 식사를 진행하기로 합니다. 어제 밤에 쌌던 밥과 반찬을 꺼내어 맛있게 들었습니다.

지리산의 거의 중심에 자리잡고 길이 사통팔달하는 이곳 세석은 다른 곳에 비해 경사가 완만하고 지역이 넓어 평전이라고도 불리우는데 옛날 지리산 빨치산들은 이곳을 사령부로 썼다고도 합니다. 그만큼 지세나 위치로 볼 때 지리산의 요충지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제 여기서 5시간 정도만 가면 오늘의 최종목적지인 연하천에 갈 것입니다. 우선 중간 목표를 여기서부터 3시간 거리인 벽소령대피소로 정하고 거기까지 열심히 가기로 합니다.

12시 10분 쯤 세석을 떠나 다시 부슬비 내리는 산길을 갑니다. 곧 이어 낙남정맥이 시작되는 영신봉 밑을 지나갑니다. 차후에 낙남정맥 종주를 꿈꾸고 있는 우명길군은 생태보호용 울타리를 넘어서 좀더 위쪽을 탐험하러 갑니다. 정병기군과 저는 먼저 떠나기로 하여 길을 나섰습니다. 영신봉에서 조금 내려가니 매우 긴 철계단이 나왔으나 내려가는 길인지라 다행히 쉽게 통과합니다. 오후 1시 8분 칠선봉을 지나고 오후 2시 04분에는 선비샘에 도착합니다. 여기선 물을 마시며 휴식하고 물통에 물을 보충합니다.

선비샘에서부터는 길이 험해지더니 음정에서 올라오는 임도와 만나는 지점 근처부터는 길이 좋아지더니 곧 벽소령대피소의 검은 지붕이 나타났습니다. 시각은 오후 2시 57분입니다.

정병기군과 저는 벽소령대피소에서 마련한 야외 벤취에 앉아 휴식하며 삶은 계란을 까 먹었습니다. 그러면서 Mt. Woo와 서중원 두 사람을 기다립니다. 15분 쯤 기다리니 두 사람이 도착하고 정병기군이 준 계란 3개를 둘이 나누어 먹습니다. 잠시 비가 그쳐 우의는 배낭속으로 모셔집니다.

3시 반쯤 정병기군과 저는 약간은 지쳐있는 두사람보다 먼저 길을 떠나며 1시간 50분 후에 연하천산장에서 만나자고 합니다. 벽소령대피소에서 형제봉까지의 길은 제법 험준한 데에다 오르내림이 심하여 조심해야 했고 힘이 들었습니다. 차차 힘도 소진되어 가고 있어 이 마지막 구간이 오늘의 가장 힘드는 산행이 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비까지 다시 내리기 시작하니 비옷을 다시 꺼내어 배낭 위로 착용합니다.

벽소령대피소로부터 약 한 시간 반은 최근에 겪지 못한 제법 힘든 산행이었습니다. 짐도 무겁고 길도 미끄러워 부상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기에 주의를 게을리 할 수 없는 그런 어려운 길이었습니다. 오후 4시 11분 형제봉을 지났으나 예상 밖으로 길은 좋아지지 않고 형제봉보다 더 높은 봉우리를 하나 통과합니다.

그러나 조금만 있으면 산행이 끝나고 쉴 수 있다는 희망이 큰 위안이 됩니다. 정군도 지쳤는지 마지막엔 뒤로 쳐지고 저 혼자 빗속을 헤치며 가게 됩니다. 드디어 오른 쪽으로 울타리가 나타나고 길이 좋아지는 듯 싶더니 연하천 대피소가 거짓말처럼 안개비 속에서 나타났습니다. 오후 5시 10분 중산리에서 산행을 시작한지 약 14시간이 되는 시점이었습니다.

길고도 긴 산행을 한 하루였습니다.어깨와 허리와 다리가 다 쑤십니다. 그러나 오늘의 보금자리에 도착하고 보니 몸은 고달파도 마음은 부자가 된 듯 매우 후련하고도 흐뭇한 감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해발 1,500m의 고산지에 자리한 연하천은 상시 물이 솟는 샘으로 유명한 곳인데 한자로는 烟霞泉이라고 표기하고 있는데 이름에서도 매우 아늑한 느낌이 납니다. 굳이 뜻을 풀이해 본다면 오묘한 대자연(烟霞)속의 정취어린 샘(泉)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리산 높은 곳에 푸른 달이 뜨고 별이 총총할 때면 여기도 또 하나의 낙원으로 변할 수 있는 곳으로 보였습니다. 이곳에 이미 예약을 하고 잘 수 있다는 것은 또 하나의 축복으로 닥아 왔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도착하기까지의 길은 참으로 길고도 멀었습니다. 순례자들이 성지를 찾아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오가듯이 저와 동료들도 오늘 이곳, 가히 성스러운 장소에 오기를 열망했고 그 꿈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연하천이라는 샘까지의 여정은 멀고도 험했습니다.

대피소 취사장에서 기다리노라니 먼저 정병기군이 도착하고 시간이 좀 지나자 우명길, 서중원 두 사람도 도착하여 저녁준비를 같이 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까지 주절이 주절이 일어났던 사실들을 엮어서 써내려 가다 보니 정말 재미없게 되어 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선 일어났던 사실들을 시간의 순서대로 기록하는 것이 산행기의 일차적인 목적이므로 좀 재미없더라도 참아 주시기 바랍니다. 다음 5편에선 좀 더 재미있게 써 볼까 합니다. 기대해 주삼.


장터목을 떠나 세석평전을 향해


구름 속의 지리산 경치


벽소령대피소(산장)


연하천대피소의 콘테이너형 취사장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