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지리산 마무리) 지리산에서 하산하다.

2008. 4. 16. 08:49명산산행기 Famous mountains

저 지리산에서 내려왔습니다. 하마, 이게 언제 쩍 이야기이냐구요? 지리산 이야기가 이제 나오니 말입니다. 이 넘이 세사람의 동지-우명길, 서중원, 정병기-와 2박3일로 지리산에 갔다가 왔다는 사실을 이미 7개의 산행기로 장황하게 보고해 드린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벌써 6개월이나 지난 이야기입지요. 그런데 지금 와서 뜬금없이 글 제목이 ‘지리산에서 하산하다’라고 붙인 소이가 무엇인지 제법 궁금해지지 않겠습니까? 그럼 그때 지리산에 들어갔던 이 넘이 아직도 그곳에서 머물고 있었다는 야그냐고 물으신다면 ‘그렇지는 않다’고 답을 드릴 수 밖에 없군요. 제가 그때 하산을 했고 이제는 산 아래 속세를 어정거리며 뻘뻘거리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이지요.


사실 제 몸이 지리산에서 하산한지 벌써 반년이나 지난 것은 맞소이다. 그러나 제 마음은 그곳에서 아직 하산하지 못하고 있다가 이제야 하산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드려야겠습니다. 지난번에 7개나 되는 꼭지로 ‘지리산 산행기’를 썼지만 그 기록이 반야봉에서 그쳤기에 산행기가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언젠가 시간을 내어 그 기록을 산행의 종점인 화엄사까지 연장해야겠다고 마음먹었는데 이제야 밀린 숙제를 하는 기분으로 이 글을 씁니다.


사실 저는 글이 완성 안 되더라도 오히려 즐거울 수가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산행기가 미완성인 동안 제 마음은 지리산에서 내려오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번에 저는 지리산을 구원이 존재하는 파라다이스로 표현한 바 있습니다. 제 마음은 낙원 속을 마음껏 쏘다니며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의 마음처럼 넉넉하고 푸근한 지리산의 품에서 놀면서 속세의 온갖 잡다한 일들을 잊을 수 있었다는 야그이지요. 그러나 이제 마음마저 지리산을 내려와서 하나의 아퀴를 지어야 합니다. 무릇 세상일엔 맺고 끊음이 있어야 하거늘 저의 지리산에 대한 그리움도 여기서 접어야 할 듯 합니다.


다시 과거를 잠시 반추(反芻)합니다. 10월 25일 새벽 지리산 산행을 시작하여 천왕봉에 오를 수 있었고 머나먼 길을 비를 맞으며 연하천 산장까지 진출했고 그 밤을 그곳 열악한 시설에서 묵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그날 밤 저의 분신인 인생이란 넘을 만나서 인생에 대해 한 수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다음날인 26일엔 새벽같이 일어나 반야봉을 향했고 새벽달을 카메라에 담으며 카타르시스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는 구원의 봉우리인 반야봉에 오를 수 있었습니다.


날씨 때문에 혹 반야봉에 오르지 못할까 노심초사했던 사실이 기억 속에 떠오릅니다. 반야봉은 너무나도 중요한 장소이었기에 그분께 꼭 오시라고 강권하다 시피 하여 그분께서는 울며 겨자먹기로 저희 네 사람에게 복을 빌어주셨습니다.   


‘너희들의 이름을 대라. 내가 너희에게 복을 내려 주겠다. 그리고 보너스로 너희들 가슴 속에 희망을 심어주마.’


안개 낀 반야봉 정상에서 저와 말씨름을 하시다가 결국은 ‘무언가 손에 잡히는 걸 달라’고 당돌하게 조르는 이 넘의 황당함에도 화내지 않으시고 기쁘게 항복하시며 해 주신 그분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저는 그분이 주신 복을 받아서는 얼른 주머니에 깊숙이 넣고 희망의 불씨는 가슴에 안은 채 다음 목적지인 노고단으로 향할 수 있었습니다.


노고단까지의 길은 지금까지의 길에 비하면 험하지 않았습니다. 복주머니를 찬 저의 마음은 저으기 기뻤기 때문에 앞뒤 동료들을 챙길 여유가 없었습니다. 홀로 생각에 취해 자동인형처럼 발길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몸이 자동으로 항해중이었다면 마음속은 그분이 약속한 복을 담뿍 머금고 약동하고 있었습니다. 거기다가 그분께서는 희망의 불씨까지 이 넘의 가슴속에 지펴 놓으셨기에 하산길은 흐뭇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서중원군은 날랜 걸음으로 이미 노고단쪽으로 가버렸고 Mt.우(명길)와 정병기군은 뒤에서 오고 있는 것 같습니다. 조금 기다리며 경치를 카메라에 넣으며 기다려 보지만 한참을 더 기다려야 뒤의 두 사람을 만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럴 바에야 먼저 노고단 산장에 가서 점심준비나 하자고 생각하여 자리를 털고 일어서서 길을 갔습니다. 가슴속의 불씨는 행여 누구에게 들킬세라 조심하면서 갔습니다.


외유내강(外柔內剛)이라는 말씀이 있지만 그날 저의 모습은 아마도 外貧內火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겉보기엔 여느 사람보다 초라했지만 그의 마음속에선 희망의 불씨가 이글이글 타오르고 있는 그런 사람 말입니다. 그 옆에 갔다간 같이 타 버리는 그런 뜨거운 사랑을 지닌 사람...(제가 오바했나요? 제가 좀 오바하길 좋아해서....죄송.)


어쨌든 노고단으로 향하는 길은 제게 부담도 없고 날씨도 저의 길을 받쳐주고 있었습니다. 전날의 무모한 14시간에 걸친 빗속의 산행과 같은 고난은 오늘은 없었지요. 룰루랄라하며  산길을 가노라니 많은 산객들이 반대쪽으로 가고 있습니다. 그들과 일일이 목례를 하며 인사를 합니다. 그러다 보니 임걸령에 쉽게 도착하고 이제 노고단은 지척입니다.


임걸령을 뒤로 하고 계속 걸었습니다. 드디어 언덕을 올라서서 돌탑이 서있는 신노고단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는 많은 사람들이 기념사진을 찍느라 부산합니다. 원래의 노고단은 여기서 남쪽으로 500미터 쯤 떨어져 있는데 생태계 보호를 위해서 출입이 금지되고 특정한 시간에만 관람할 수 있게 하고 있습니다. 여기 쯤에서 기다릴 줄 알았던 서중원군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가 않습니다. 신노고단의 공터에 서서 천왕봉 쪽을 조망해 보았습니다. 보통 때라면 여기서의 전망이 죽여 줄 터인데 오늘은 아쉽게도 아니올시다 입니다. 날씨가 좋아졌다지만 어제에 비해 좋아졌다는 것이고, 멋진 경치를 조망할 수 있게 확 개이지는 않았나 봅니다.


서중원군이 혹시 아래 쪽의 노고단 산장에 먼저 도착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쉬다가 산장쪽으로 천천히 내려갑니다. 점심준비도 미리 해 놓아야겠습니다. 조금 내려가면 노고단 산장으로 숙박시설이 되어있는 곳인데 한창 확장공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벤치 주변에는 이미 몇몇 산객들이 식사를 준비하거나 밥을 먹고 있었습니다. 저는 그곳 한 쪽에 배낭을 풀고 바람을 피해 버너를 셋팅하였습니다.


수도에서 물을 떠다가 코펠에 넣고 라면을 끓이기 위해 불을 지피고 동료들을 기다립니다. 약간의 바람이 불고 있는데 옅은 구름이 끼었지만 햇빛을 느낄 수 있는 따스한 가을날입니다. 벤치에 앉아 햇빛을 듬뿍 쬡니다. 오가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경치를 감상하노라니 노곤해지며 졸음이 밀려옵니다. 졸음을 이기며 하품을 합니다. 졸음 대신 무언가 해냈다는 성취감이 밀려와서 가슴속에서 끓어 오릅니다. 마침 밖에선 물이 끓어 오르기 시작하는데 서중원군이 도착했습니다. 진짜 노고단까지의 길이 열려 있어서 그곳에 다녀오느라 늦었다고 합니다. 저는 지레 짐작으로 포기했던 길인데 그는 선입감 없이 도전했기에 좋은 구경을 한 셈이었습니다.


조금 더 기다리니 Mt.우와 정병기군이 도착하여 우리는 다시 한 팀이 되었습니다. 라면을 끓이고 남은 음식을 다 꺼내어 성찬을 즐겼습니다. 저녁은 매식을 할 예정이기에 남은 음식을 다 먹어야 합니다.


이곳에서 조금만 내려가면 성삼재입니다. 아주 쉬운 길입니다. 그곳에 가면 구례로 가는 버스가 있어 그곳을 저희 산행의 종점으로 삼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저희 계획은 성삼재 조금 못미쳐 코재에서 좌측으로 내려가서 계곡을 통해 화엄사까지 몇 시간을 더 걸어 내려가는 산행계획을 세워 놓았기에 계획대로 실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저희는 넓은 길을 따라 사람들에 싸여 내려갔고 곧 코재에 도착했습니다. 여기서도 저 멀리 섬진강과 남쪽의 산들이 조망되는 전망 포인트인데 날씨 때문에 볼 수 없어 서운했습니다. 이제는 화엄사까지 계속해서 내려가기만 하면 되는데 돌로 된 길이 약간은 미끄럽기도 했습니다. 오후 6시 구례구역에서 서울행 기차를 타도록 예약이 되어 있기에 약간은 시간의 압박이 왔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조금 빨리 움직이기로 하였고, 정병기군과 저는 앞장서서 빠르게 내려갔습니다.


쉬지도 않고 한 시간 이상이나 내려가다가 둘은 길섶에 앉아 쉬기로 했습니다. 빠르게 걸은 탓으로 몸에 땀이 흥건히 났기에 겉옷을 벗어서 배낭속에 넣었습니다. 그리고선 조금을 더 걷는데 샘이 하나 나타났습니다. 물을 마시기 위해 바가지를 잡는데 갑자기 저의 GPS가 생각났습니다. 산악용 GPS로 가민(Garmin) 제품(60CSX)인데 여태까지 1년 가까이나 저와 같이 산행을 하던 놈이었지요. 아뿔사, 겉옷을 배낭에 넣으면서 겉옷의 주머니에 있던 GPS를 꺼내서 손에 든다는 것이, 그냥 길섶에 놓고 온 것이었습니다.


배낭을 팽개치고 불이나케 길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아까 쉬었음직 한 곳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살펴보지만 GPS는 어디론가 사라졌습니다. 다시 내려오면서 살펴보고 다시 거슬러 올라가지만 보이지가 않고 포기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동안 뒤에서 오던 서중원군과 Mt. 우도 만났기에 저간 사정을 이야기하고 먼저 가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다시 찬찬이 길섶을 뒤져 보지만 귀중한 물건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이제 찾기를 포기하기로 합니다.


GPS 찾기를 포기하고 빠르게 아래로 내려가니 세 사람이 개울에서 탁족을 하며 몸을 식히고 있었습니다. 고맙게도 정병기군이 제 배낭을 거기까지 가지고 내려와 주었습니다. 저도 물속에 뛰어들어 그 시원함을 맛보았습니다. 기차시각까지의 시간을 역산해 보는데 저희가 늦지는 않았습니다. 코재에서 여기까지 원체 빨리 내려왔기에 계획대로 화엄사 구경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저희는 냇물에서 나와 다시 빠르게 화업사를 향했습니다. 한 30-40분을 부지런히 걸으니 드디어 화엄사 절에 도착하였습니다. 화엄사는 볼 것이 많은 절입니다. 우선 우리나라 최대의 목조건물이라는 각황전을 보고 나머지 건물들을 둘러 봅니다. 오늘 제가 동료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곳은 따로 있었습니다. 뒤쪽에 있는 암자 중에 구층암이라는 곳이 있는데 그 암자건물이 특이한 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곳의 두 건물을 보면 가공하지 않은 자연 모습 그대로의 모과나무를 기둥으로 쓴 점입니다. 이미 저는 예전에 그곳에 가서 보고 사진촬영을 해 놓은 바이지만 동료들에게도 꼭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서중원군만이 제 옆에 보이고 두 사람은 다른 곳에 있는지 보이지가 않았습니다.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에 서군만을 독려하여 절 뒤의 암자로 올라갔습니다.


헉헉거리며 구층암에 도착하니 자연 모습의 모과나무 기둥 대여섯 개가 여느 때처럼 저를 반겨줍니다. 서군을 그 앞에 세우고 셨터를 눌러 댑니다. 그리고는 시간을 탓하며 아래로 내려왔습니다. 화엄사에선 각황전 말고 또 하나의 국보인 사자가 받치고 있는 석탑을 보아야 하는데 그 위치를 금방 기억해 낼 수가 없었습니다. 시간이 촉박하여 사자탑의 관람은 생략하기로 하고 절을 나왔습니다.


절로 들어가는 길과 계단에 화강암 돌을 깔았는데 그것을 만들기 위해 들어간 돈이 제법 되었을 터인데 그 액수가 제법 클 듯 하였는데 그 사실이 정병기군을 화나게 했나 봅니다. 절이 너무 호화롭다고 그래선 안 될 것이라고 따끔하게 비판합니다.


절에서 조금 걸어내려 오니 마침 택시 한 대가 손님을 태우고 도착하기에. 그 택시를 잡아서 타고 구례구역까지 쉽게 올 수 있었습니다. 시간은 마술처럼 척척 맞아 들어갑니다. 저녁 먹을 시간도 1시간이나 확보됩니다. 우리는 역전의 한 음식점에 들어가 식사를 시켰습니다. 이제 술과 밥의 파라다이스에서 여행이 주었던 긴장이 모두 풀어집니다. 산행에 얽힌 이런저런 이야기꽃이 피는 순간입니다. 소주 몇 잔에 젖어서 천천히 취하다보니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이제는 아득한 기억의 저편에 있지만 아주 재미있는 이야기들인 건 틀림 없었습니다. 그때의 그 고양되었던 기분은 아직도 제 마음 속에 맴돌고 있기 때문이지요.


2007년은 저에게 있어 위대한 한 해였습니다. 1년이라는 시간을 안식년으로 받아서 충분히 쉴 수 있었고 쉬는 동안 마음껏 산에 갈 수 있어 좋았습니다. 저는 그 덕에 혼자서 또는 동료들과 한국의 산하를 헤맬 수 있었습니다. 수십 번의 산행을 성공적으로 했고 특히나 일본의 후지산과 다테야마에도 오를 수 있었으며 어머니와 같은 산인 지리산에도 두 번이나 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산행 중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10월 말에 갔던 지리산 산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2박3일이라는 긴 시간과 악천후와의 대결, 비좁은 산장에서의 또 다른 저인 인생과의 조우, 구원의 봉우리에서의 그분이 주신 은총 등이 생각키우고 이들에 대한 단상이 8개의 꼭지로 산행기라는 이름으로 씌어질 수 있었기에 제 나름으로 지리산 산행이 제 산행 중 하이라이트였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저는 어렵게 오른 지리산에서 속세로 내려오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곳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심정은 1년을 실컷 안식하던 이 넘이 일상의 하던 일로 돌아오기 싫은 심정과 아주 흡사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마음이나마 지리산에 두고 왔던 것입니다. Cony Francis 가 불렀던 팝송 ‘I left my heart in San francisco' 의 심정이라고나 할까요.


지나고 보니 지리산은 있을 만한 곳이었습니다. 그곳에 가 보니 그곳은 저의 상상력이 부풀어 터질 정도로 고양되고 제 눈은 저절로 즐거워지는 그런 곳이었습니다. 그러나 저는 속세에서 기다리는 일들을 손보기 위해서 지리산을 내려와야 했습니다. 그 날은 우선 몸만 하산했드랬습니다. 마음은 여직껏 그곳에 두고 내려왔다는 야그입니다.


그러나 전 이제 제 마음마저 지리산에서 회수하려 합니다. 저를 기다리는 서류들과 사람들과 과업들, 거기에 충실하려면 지리산 산자락에서 노닐고 있는 제 마음이란 넘을 억지로라도 붙잡아 와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선 산행기의 기록을 종점까지 연장해야 했습니다. 그래서 사족같고 별 재미없는 이 글이 늦게나마 써지게 된 것입니다. 그래도 저는 해야 하는 숙제를 마친 것처럼 마음이 홀가분합니다. 산행기의 종점은 전라선의 기차역인 구례구역이었습니다.


- 후기 -

 

지리산에서 제 마음마저 내려왔다는 이야기는 저의 파라다이스는 끝났다는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그 파라다이스의 추억은 제가 속세의 질곡에서 딩굴더라도 다시 낙원으로 돌아갈 꿈을 꾸게 해주네요.


어제 밤, 그분께서 넌지시 찾아 오셨습니다.

‘그 동안 잘 놀았지? 이제 현실에 적응이 좀 되냐?’


저는 대답대신 질문을 드렸습니다.

‘이 지겨운 속세는 언제까지입니까? 저는 파라다이스를 원합니다.’


‘낙원은 네 마음속에 있거늘 그리도 못 믿겠느냐?’

그분은 범생이같은 말씀만.


‘저는 진짜를 원합니다. 지리산처럼 만질 수 있고 볼 수도 있는...“


‘마음으로 느끼고 보도록 해라.’

그분은 고담준론으로 이 넘을 훈육하신다.


이 넘은 실리를 엿 봅니다..

‘사실 전 살 빼기 위해서라도 또 가야 하는 거 아닙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