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8 돈의문터 박물관 마을과 정동에서 역사와 마주하다

2022. 12. 9. 20:56포토DOCUMENTARY

   12월 8일(수) 돈의문과 정동일대 트레킹에 고교 동기 20인이 참석하여 성황을 이루었다.(여성 2인은 동기의 부인들) 오전 10시 반,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모이기로 하였는데 조금 일찍 도착한 사람들은 역사 안 지하에서 친구들을 기다리는데 마침 지하전시장에서 “문 민”이란 이의 조각과 다른 이들의 회화가 전시중이라서 짧은 시간이지만 작품을 감상할 수 있었다.

   시간이 되어 1번 출구 밖으로 나가 인원 점검을 한 후 광화문역 1번 출구에서 경희궁을 향하여 출발하였다. 오늘 참석자는 모두 20명이었다.

   서울역사박물관을 지나쳐 경희궁의 정문(원래 자리에서 옮겨 지은 것)인 흥화문을 통과하여 숭정전 정면에 세운 숭정문 앞에서 경희궁에 대한 트레킹클럽 회장(오시정)의 해설을 경청하였다. 경희궁은 광해군 9년(1617년)에 건립한 이후 10대에 걸쳐 임금들이 정사를 보았던 궁궐이다. 서울시에 있는 5대 궁궐 중에서 서쪽에 자리하여 서궐로도 불렸으며, 새문안 대궐, 새문동 대궐, 아주개 대궐이라고도 하였고 경운궁(덕수궁)과 홍교로 연결되어 있었다고 한다. 5대궁 가운데 철저히 파괴되어 흥화문과 숭정전, 그리고 후원의 황학정, 세 채만 원상태로 남아 있다.(숭정전은 현재 공사중이었다.)

   다음 목적지는 돈의문 터를 중심으로 조성된 박물관 마을이다. 돈의문은 서대문의 정식 명칭으로 1396년 신축 후 경복궁의 지맥을 해친다는 이유로 해체되었다가 1422년 현재 정동사거리에 세워져 “새문”이라는 별칭이 붙었는데 일제기에 도시계획을 구실로 훼철되고 말아서 사대문 중에 오직 하나 “사라진 문”이 되고 말았다.

   돈의문의 안쪽 동네를 새문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는데 2015년 서울시는 돈의문이 있던 주변 건물들을 보존하여 마을 전체를 박물관으로 변모시킨다는 계획을 세워 “돈의문 박물관 마을”이라는 관광지가 탄생한 것이다. 마을 개설 후 코로나 사태로 인해 대중에게 열어서 관람하게 하는 것은 최근의 일인데, 서울 100년의 역사를 복원하고 보여주기 위해 여러 테마의 박물관들을 열고 있었다.

   시간의 제약 때문에 주마간산으로 지나쳤지만 차차 시간을 두고 견학해 볼 만한 장소이다.(돈의문역사관, 삼대가옥, 서대문여관, 생활사전시관, 돈의문구락부, 돈의문AV•VR체험관, 스코필드기념관, 콤퓨타게임장, 새문안극장, 서대문사진관, 삼거리이용원, 서울음악사, 서울미래유산관, 서울도시재생이야기관 등의 볼거리가 있다.)

   마을의 중심에는 사방 벽이 유리로 된 휴게 건물이 하나 있어 20인이 모여서 가지고 온 다과로 간단한 다과회를 갖고 잠시 편하게 휴식할 수 있었다.

   휴식 후 큰 길을 건너서 정동으로 들어섰다.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서 창덕여중 뒤에 조선시대 서울성곽의 원 모습을 보여준다는 장소까지 가서 성곽의 돌을 쌓은 흔적을 보고 돌아 나왔다. 그 다음에는 구러시아 공사관을 보러 갔다. 이곳 아라사공사관은 조선말인 1896년 2월 11일부터 1년간 고종과 세자가 경복궁을 떠나 어가(御駕)를 러시아제국 공사관으로 옮겨서 파천한 소위 아관파천이 일어났던 곳이다.

   을미사변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고종이 러시아에 몸을 의탁한 사건인데 아관파천 이후 많은 이권이 러시아를 위시한 열강의 손에 넘어갔다. 지금 보아도 약소국이 겪는 불행에 열불이 나는 장소이다. 마침 공사관은 리모델링이라도 하는지 가벽으로 가리고 공사중이었다. “공사관은 공사 중”이라는 누군가의 죠크가 들려왔다.

   520년 수령의 회화나무를 지나 중명전으로 갔다. 중명전은 덕수궁에 딸린 2층의 서양식 전각이다. 원래의 이름은 수옥헌(漱玉軒)이었으나, 1904년 경운궁에 화재가 나자 고종이 이곳으로 거처를 옮기게 되면서 중명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고 한다.

   이곳의 볼거리는 을사늑약을 강요하는 회의 장면인데 1층 현관을 들어가자마자 이토 히로부미가 의장석에 앉고 그 앞에 일본공사 하야시와 8인의 조선 대신이 회의 테이블 양쪽으로 앉아있는 회의 장면을 실물 모형으로 재현해 놓은 광경을 볼 수가 있다. 을사늑약에 끝까지 반대한 3인이 한규설, 민영기, 이하영이었고 조약에 찬성한 을사5적은 이완용, 이근택, 이지용, 박제순, 권중현의 5인이다.

   오늘 걷는 중에 볼 수 있는 것 중 가장 참담한 광경이다. 국력이 약해져서 외적의 침략을 허용해야 하는 지경에 당하지 않도록 국민이 분발해야 하겠고 개인은 결정적인 순간에 매국노가 되지 않도록 마음을 단단히 먹을 필요가 있다. 중명전은 역사박물관으로 대중에게 열려 있는데 고종의 헤이그 특사사건에 대해서 설명하고 헤이그 평화회의에 고종의 친서를 가지고 비밀리에 파견되었던 애국자 세 분(이준, 이상설, 이위종의 3열사)에 대해서도 잘 설명하고 있었다.

   방문객용으로 비치되어 있었는데, 영국, 독일, 불란서 황제에게 고종 황제가 보내는 편지(친서라고 써 있는데 앞 면에 한글, 뒷면에 한문과 영어로 된 문서)를 각각 1장씩 3장을 기념으로 가지고 나왔다.(편지에 옥새를 찍는 게 가능한데 현재 고장나서 불가능) 편지 말미에 “한성에서 이경(李㷡) 삼가올림”이라고 되어 있어 직명을 쓰지 않고 개인 이름을 쓴 게 특이했고 고종의 이름이 “경”이라는 어려운 한자인 것을 알 수 있었다.(여기 위에 제시한 㷡자는 틀렸는데 '한글'워드에서 비슷한 글자를 찾아서 보여준 것이다. 원래라면 불꽃 熙의 윗부분에 불 火를 받침으로 한 글자가 맞다. 아래 편지 사진 참조)

   조선의 몰락과 일본의 침략에 대해 생각하면서 중명전을 나와 정동교회 앞에서 북쪽으로 꺾어서 경복궁 담장을 따라 걷다가 고종의 길로 갔다. 경복궁 담장을 따라가다가 왼쪽으로 꺾어 언덕길을 올라가는데 여기가 고종의 길이다. 골목길을 따라서 언덕을 넘어 가면 러시아공관으로 갈 수 있는데 고종이 아관파천 때 이 길을 따라서 피신하지 않았을까 추정하고 있다. 우리 일행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이 길을 오고가고 있었는데 역사에 대한 궁금증이 사람들로 하여금 이 길을 탐방하도록 하고 있는 것은 아닐는지?

   우리 일행은 러시아공사관까지 가지 않고 언덕에 올라 다른 장소에서처럼 똑 같이 오회장의 해설을 경청하였다. 여기서는 큰길 건너 건물 틈으로 최근에 새로 지은 새문안교회의 꼬리를 볼 수 있었다.(헐려진 새문의 정기가 새문안교회로 이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보았다.)

   일행은 고종의 길을 중간에서 돌아 나와 정동교회를 지나서 주한 러시아대사관을 뒤에 두고 배재학당 앞에 멈춰 섰다, 독립선언서를 읽고 있는 모녀의 동상 앞에서 다시 오회장의 해설을 들었다. 이곳에 배재학당과 독립운동에 관한 박물관이 있다는데 박물관은 시간 관계상 들르지 못하였다. 최종 목적지인 소의문 가는 길에 아펜젤러기념공원이란 간판이 보였다.(다음에 와서 근처 유적을 찬찬히 더 보아야 하겠다.)

   평안교회의 뾰족탑을 지나고 서소문 육교 아래로 큰 길을 건너 소의문 터에서 다시 멈춰 섰다. 이곳은 대문이 아닌 소문의 하나인 소의문(일명 서소문)이 있던 자리로서 큰 문과는 다른 작은 문의 기능에 충실했던 곳이라고 한다.

   트레킹도 이제 거의 끝났다. 상공회의소 부근을 지나서 서울역을 보면서 남대문을 돌아 남대문시장으로 갔다. 갈치조림 골목으로 들어가 “희락갈치”란 집에 들어가 2층에 자리 잡았다. 손님이 끊이지 않고 매우 분주한 집이었다. 갈치조림을 시키고 막걸리를 한 잔씩 마실 수 있었다. 겨울 날씨치고는 매우 푹한 날씨에 하늘도 맑게 개여 기분이 좋은 날, 이렇게 여러 곳을 보며 걷는 즐거운 트레킹은 끝났다.

   (트레킹 경로와 현장에서 찍은 사진을 싣는다. 여행의 시간에 관심이 있는 분을 위해 각 사진에는 우측 하단에 촬영시각을 기록하였다.)

 

                                                                                           - 후기 -

   날이 온화하고 하늘이 맑은 날이었다. 20인이라는 적지 않은 수의 동료들이 광화문에서 시작하여 정동으로 해서 남대문까지 역사를 공부하며 걸었다. 오회장의 사전 준비로 수준높은 해설을 들을 수 있었다. 걷는 것보다 학습이 부담되는 트레킹일 수 있었고 동기모임인 역사탐방을 따르는 제2의 역사탐방이 아닌가 할 정도로 지식의 양이 많았다. 그러나 역사는 현장에서 그 디테일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법이니 걷기도 하면서 이런 기회에 역사지식도 높이고 역사관도 다듬어야 하겠다.

   사실 이 거리를 걸으면서 역사와 맞닥뜨리게 되니까 마음에 걸리는 것은 조선의 운명과 역사에 대한 회한이다. 아관파천으로 국운이 많이 쇠하여졌고 을사늑약으로 조선이 일본의 반식민지로 전락한 사실을 현장에서 느껴야 하는 고통의 길이 여기이기도 했다.

   중명전에서 받은, 고종황제가 영국대군주 겸 인도국 대황제 폐하께 올리는 글월(친서)을 제시해 본다. 1905년 11월 18일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이 무효임을 주장 설명하고 있다. 사후 약방문에 지나지 않지만 고종의 노력이 가상하다 고나 해야 할까?

 

   ▼ 고종의 길 언덕에서 건너다 보니 건물들 사이로 새로 지은 새문안교회의 꼬리가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