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14 오대천 상류(월정교~청심재)를 두 번째 걸으며 평창의 위상을 생각해 보다

2022. 6. 17. 10:07포토DOCUMENTARY

   15일 만에 지난 번 만났던 지식인들과 한 팀이 되어 오대천 걷기를 이어갔다. 모두 9인이 같이 했는데 인원 구성에 소폭 조정이 있었다. 박교수, 홍교수, 시인, 세 분이 다른 일로 빠지고 운곡과 이교수 중학교 동창인 친구 한 분과 강릉서 온 전직 PD 한 분, 즉, 다른 세 분이 같이 걸었다.(결국 걷는 사람 수는 9인으로 지난 번과 같다. 다음 번에도 구성은 또 바뀔 듯)

   이번에 걷는 길의 거리는 11km 정도인데 월정교 근처에서 시작하여 청심대까지 갈 예정이다.

   지난번처럼 아침 10시 39분 진부역에 도착하여 이교수와 부부장이 차를 가지고 마중 나와 주었다. 8인이 차 두 대에 나누어 타고 지난 번 갔던 청국장 집으로 가서 점심식사를 시켰는데 운곡이 트럭을 타고 도착했다. 청국장을 시켜서 먹고 막걸리도 한잔 걸쳤다.

   지난 번 걷기를 마친 지점과는 조금 하류인 월정교 부근에서 걷기를 시작하기 위해 트럭까지 3대의 차로 현장으로 갔다. 월정천이 오대천과 합류하기 직전의 위치에 월정천을 막은 얕은 보가 있었는데 그 곳이 시작점이었다.

   이교수 차와 운곡의 트럭이 걷기를 마치는 지점인 청심대로 갔다가 이교수 차를 거기 두고 트럭으로 돌아오는 동안 일곱 사람은 한참을 시작점에서 기다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비가 약하게 내리는 듯하여 우산을 꺼내고 몇 사람은 비닐 우의를 입었다.

   12:50, 이교수와 운곡이 돌아오고 걷기가 시작되었다. 강변으로 흙길이 나있는데 얕게 강물이 흐르는 강바닥은 풀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물이 깊은 그런 강이 아니다. 얕고 넓은데 물줄기는 강 넓이의 1/10도 안 될 것 같다. 보를 막은 곳에서 콘크리트 물길을 따라 농토를 적시기 위해 흘러내리는 물의 속도가 제법 빨라 생동감이 느껴진다.

    펀펀하고 풀이 낮게 자라는 강변 풍경이 한국의 풍경같지 않고 어디 외국에 온 듯한 기분이었다. 영국의 히스가 무성한 들판을 상상해 보았다.(영국의 황무지에 대해 듣기는 했지만 실제 영국의 시골에 가 본 적은 없다.)

   검은 꼬리를 세우고 있는 족제비 싸리나무를 보고 고들빼기와 씀바귀를 구별해 보고 물가에서 흔히 보는 버드나무를 감상하며 길을 가다가 운곡이 돌을 하나 보여준다. 조금 주의해서 보면 마치 남녀가 부둥켜안은 모양의 돌이었다.(사진)

    길은 고속도로를 아래로 통과하여 넓게 농토가 조성된 곳으로 나가는데 콘크리트 바닥으로 된 농로이다. 밭에는 당근과 파, 고랭지 배추가 보이고 감자가 보이는데 하얗게 감자 꽃이 피어 있었다. 감자 꽃은 피는 대로 두면 쓸데없이 양분을 낭비하게 되므로 나오는 대로 꺾어 주어야 한다고 최교수가 가르쳐 주는데, 이 분들은 게을러서인지 꽃을 방치해 놓고 있었다. 덕분에 평소에는 보기 힘든 감자 꽃을 실컷 볼 수 있었다.

   보가 있는 곳에선 물이 모여서 물길이 넓어지니 멀리서 보면 제법 강다운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길은 진부의 중심지라고 할 수 있는 역 근처의 로타리를 지나가더니 계속해서 남쪽을 향하여 송어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이어간다.

   꽃과 나무를 구경하며 걷는 중에 송어축제가 열리는 장소의 반대편 강변에서 그린 듯한 전원주택이 나타났다. 앞서 걷던 이교수가 그 집 앞에서 주인을 만났는데 알고 지내는 지인이라고 한다.(14:15) 우연히 조우한 그 분의 초청을 받아 응접 동으로 들어가서 대접을 받았다. 직접 내린 커피와 참외, 떡을 제공받았는데 생각지도 못한 환대였다.(고맙습니다.)

   그 분은 이교수가 평창에서 만나 알게 된 분인데 경북 금릉군(김천) 출신으로 유수한 고교(김천고:사립인 점이 이채롭다.) 출신인데 사이판에서 28년간 사업을 하여 성공적으로 끝내고 귀국하여 이곳을 지목하여 주택을 신축하고 6-7년 동안 전원생활을 하고 있다고 하며, 겨울에는 추위를 피해 사이판에서 지낸다고 한다.(한 달 후 7월이면 또 사이판으로 갈 예정이라고 한다.) 그 분의 이야기를 들어가며 집 주위를 돌아보면서 드는 생각이 이 분이 평창에서 멋지게 전원생활을 하고 있는 듯이 보였고 모든 게 부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충격적인 말씀을 들었다. 앞으로 한 5년을 여기서 지내고 나서는 모든 것을 정리하고 도시로 떠날 예정이라고 한다.

   이유는 더 나이가 들면 전원생활을 할 체력이 받쳐주지 못 할 것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나보다 한 살 정도 덜 먹은 나이인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데 솔직히 내가 전혀 생각지 못한 내 고정관념에 대한 일격이었고 걷는 내내 곱씹어 가며 천착해야 했던 화두였다.(이 사건은 후기에서 다시 논의해봐야 할 중요한 논제이다.)

   가야할 길이 있기에 아쉽지만 주인 내외의 환대에 감사하고 목적지인 청심정을 향해 떠났다. 걷는 속도가 달라서 그룹은 두 셋으로 갈라져서 움직인다. 강을 따라가던 길은 다리를 건너더니 굽어지는 강을 떠나서 직선으로 가다가 다시 강을 만나 강변으로 난 큰 찻길을 따라간다.

   차가 드문드문 다니지만 신경이 쓰였다. 드디어 길이 상승하는 언덕위로 청심대가 보이고 바위 위에 지어 놓은 정자가 보였다. 멀리서도 길 위에서 보면 돋보이는 위치에 서 있으니 역시 명당자리라고 생각된다. 조금 걷기에 꾀가 나려고 하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기분이 좋다.(지난 5월 23일 골지천을 걷고난 후 한번 방문한 이력이 있다.) 비는 아주 약하게 계속 뿌리고 있다. 일행보다 먼저 청심대 주차장에 도착한 이교수는 주차되었던 차를 몰고 다른 두 대의 차를 가질러 떠난다.(16:51, 물론 아직 청심대에 도착 안 한 기사 두 분을 길 위에서 태우고 갔을 것이다.)

    차를 가지러 월정교로 간 3인이 북을 들고 돌아오자 정자 안에서 약식 콘서트가 열렸다. 장르는 국악이고 주제는 판소리이다. 저녁 6시에 식당을 예약하였기에 시간에 맞춰 청심대에서 철수하였다. 저녁을 예약한 음식점은 진부역으로 돌아가는 길에 있는 “산골이야기”라는 토종닭 요릿집이다.

   전복상황백숙을 두 냄비 시켰는데 옻을 넣은 닭을 먹는 그룹과 넣지 않은 닭을 먹는 그룹으로 9인이 4대5로 갈라서 앉았다. 주류로는 막걸리를 시키고 손님이 없이 우리가 독점하였으므로 작은 음악회가 다시 가능했다. 국악과 친근한 세 분(이교수, 오PD, 운곡)이 흥을 돋우고 새로 온 분의 클라리넷 연주가 있었다. 이어서 부부장의 노래가 있었는데 “너영 나영”하는 노래였고 그 후에 이교수의 지목으로 나도 나서게 되었다.(사실 감성밀도가 충만한 자리에 합석하기 위해 미리 팝송 가사를 하나 적어서 가져갔기에 프린트 물을 좌중에 돌리고 노래를 해보는데 연습부족으로 고음이 안 나오고 부끄러운 공연이 되고 말았다.)

   싱겁게 나의 노래는 끝나고 떠날 때가 되었다.(앞으로 이 노래를 더욱 다듬어 볼 요량인데 어떨는지?) 부부장의 차에 타고 진부역까지 편하게 올 수 있었다. 석주, 최교수, 오PD, 나, 넷이서 밤 8시발 서울행 KTX 열차를 탔다.

   마침 최교수 자리가 바로 내 옆자리여서 같이 앉아 이런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깜박 졸다 보니 금방 청량리이다. 조는 동안에도 기차는 서쪽으로 빨리 달려온 셈이다. 청량리역에서 내려 경의중앙선을 타고 옥수역에 내려 3호선으로 갈아타고 집에 무사히 돌아왔다. 지성과 감성이 높은 이들과 함께 한 하루였다. 거기다가 우연이었지만 전원생활의 달인까지 만난 날이었으니.....

 

- 후기 -

 

   1. 평창을 들어 올려라.

   평창의 아이덴티티(정체성)는 무엇일까? “2018년 동계올림픽”이 사람들에게 과거의 성공적 이벤트로서 어필하고 있지만, 지금 군에서 선전하고 있는 ”해피Y700“은 그 특색을 얼마나 알아줄 것인지? 고도 700m가 인간의 건강한 생활에 가장 적합한 높이라는 설정은 긍정적이나 해피700이라는 슬로건에서 사람들은 평창이 한국 최고의 고지대임을 자랑하려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나 태백시가 이미 한국 최고의 고원지대로 평균고도가 900m라고 선언한 것에서 보듯이 평창이 최고 높은 고지대는 아니기에 700이 주는 공감이 약해진다.

   어느 지역이 자기만의 특색을 갖기 위해서는 우선 지리적으로 고립(독립)될 필요가 있다. 제주도나 울릉도를 생각해 보면 알 수 있듯이 바다로 인해 고립된 지역이라서 독특한 아이덴티티를 발현하기에 유리한 환경이다. 해안지역의 경우에도 바다가 경계를 만들어 주고 도로의 종점이 되니 반은 먹고 들어간다.

   영동고속고도로나 강릉선 철로로 움직여 보면 어디서 어디까지가 평창 땅인지 지도를 보며 가기 전에는 알 수가 없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평창역에서 철로를 끊고 종착역을 설치했다면 지역의 독립성은 훨씬 도드라졌을 터이다.

   어느 지역의 특색은 그 지역을 대표하는 도시가 있을 때에는 그 대표도시의 특징이 바로 그 지역의 특성이 될 수 있으나 평창은 그렇지 못하다. 평창을 서에서 동으로 통과하는 영동고속도로에는 면온, 평창, 속사, 진부, 대관령으로 인터체인지(나들목)가 5개나 있고 기차역도 평창역과 진부역, 두 개가 있어 평창이 제법 넓은 군임을 알 수 있으나 평창읍은 중심 교통축에서 멀리 떨어져 있고 교통이 편리한 장평, 진부 등 흩어진 도시에 인구가 몰리는 등 우월한 중심지가 없는 것이 특징이다. 이효석 문학관이 있는 봉평이 문화적 중심이 되고 용평리조트가 스포츠 문화의 중심이 되어 평창 전체를 대표하는 도시나 지역을 정하기 힘들게 한다.

   현재 평창하면 떠오르는 것은 오대산, 용평스키장 정도이고 특별한 아이덴티티가 떠오르지는 않는다. 앞으로 어떻게 평창을 꾸며서 사람들에게 어필할지가 숙제이다. 수려한 경치를 재산으로 관광을 증진하고 사람들이 와서 살기 좋은 고장으로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이번 걷기에 비가 약하게 내린 탓도 있으나 평창의 기온이 아주 낮아서 추울 지경이었다. 평창에서 여름에 무더위를 겪지 않고 걸을 수 있다면 요즘 말로 대박일 것 같다. 시원한 기후가 셀링 포인트이다.)

   강릉선 개통으로 교통이 좋아졌으니 공해가 적은 대학이나 연구기관을 유치하는 것도 좋은 방책이겠고 경치 좋은 강변을 따라 전원주택을 많이 짓는 것도 생각해 볼 수 있다. 한 가지 유의점을 이야기한다면 이러한 개발에 있어서 환경의 훼손을 철저히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다. 환경이 파괴되면 관광 증진은 실패할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2. 전원주택 시말서 - 꿈은 꿈일 때 아름답다

   우연히도 이번 여행에서 이상적인 전원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사람을 한 분 만났다. 이교수의 지인으로 6-7년 전 이곳 오대천 변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부인과 둘이서 잘 살고 있는 우리와 동년배인 분이다. 살림집에 응접공간이 적어서 다시 한 채를 짓고 응접실을 만들었단다.(그 방 테이블에서 대접을 받았다.) 주방 뒤로 설치한 대형 유리창을 통해서는 뒷산의 키 큰 소나무들을 감상할 수 있다. 황토방과 사우나도 설치했다. 집 앞에는 적당한 크기의 텃밭이 있고 복승아 나무와 몇 가지 작물이 자라고 있다.

   집은 서향했는데 앞에 흐르는 오대천의 강물을 볼 수 있고 강 건너에는 송어축제장이 있어 겨울엔 송어축제를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고 한다. 마당에는 짚 차 한 대와 다른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본 채를 보니 유리창 안으로 할리 데이비슨 한 대가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주인은 외국에서 사업에 성공한 후 이곳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내가 보기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어 풍족한 살림으로 이상적인 전원생활을 하는 것처럼 보였고, 집주인도 이야기하는 투로 보아 대체로 자기가 택한 생활에 만족감을 느끼고 있는 듯하였다. 전원생활을 실천하지 못 할 것임을 예측하면서도 아직 전원에 대한 로망을 가지고 있는 내게 있어 바로 눈앞에서 그런 로망을 실현한 분을 보게 되고 전원생활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던 것은 큰 행운이었다.

   그런데 그분의 말씀 한 마디가 나를 놀라게 했다. 5년 정도 지나면 이곳 전원생활을 정리할 생각이라고 한다. 그 때 쯤이면 노령이 되어 전원생활을 해나가는데 필요한 체력이 없어질 것 같아서라고 한다.(올해에 들어 텃밭도 벌써 힘에 부쳐 다른 사람이 짓도록 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듣자마자 “아,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에서의 의료혜택, 자녀나 친한 사람들과의 교류, 거기다 문화생활을 하려면 시골에선 안 되지.”

   그러나 곧 솟구치는 다음 생각은 "이건 아닌데"였다. 애써서 마련한 이 모든 장치들을 파하고 도시로 돌아간다는 발상이 꽤나 충격이었다. 겨우 11-2년 살자고 이 집을 이처럼 정성들여 지었단 말인가? 만약 나라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마 그런 예상을 했다면 집을 아예 안 지었거나, 집을 지은 이상 죽을 때까지 살 게 될 것 같다.(혹시 내가 알 수 없는 어떤 이유로 그 분이 말은 그렇게 하지만 이미 지금의 전원생활에 싫증을 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인생은 꿈을 꾸고 실현하는 과정일진대, 그 꿈을 실현하는 사람도 있고 꿈으로만 간직하고 실현하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집주인은 꿈을 실현해 보고 다시 그 꿈을 지우겠다는 사람이고 나는 꿈만 꾸고 실천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 분을 만나고 나서는 내가 전원주택을 마련하지 않는 것에 대한 훌륭한 익스큐즈(변명)가 생길 것 같다. 꿈을 실현한 후에 그 꿈을 지워야 한다면, 꿈을 맘속에 간직하여 자주 꺼내보면서 즐길 뿐 실천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공리적인” 핑계이다.

“포도를 힘들여 따 본들 시어서 못 먹을 터인데 나무에 올라가는 수고를 할 필요가 있나? 참고 말지.”하고 포기하던 이솝 이야기 중의 한 여우의 처지가 생각나며 뭔가 내 뒤가 켕기는 듯하다.

 

   3. 조선시대의 애절한 연애

   걷기가 끝나는 곳, 경치가 좋은 언덕 위에 청심대가 있었다. 바위 동산 위에 청심대라는 정자(1927년 신축, 1986년 중건)를 지어놓았는데 다시 그 앞 정상에 예기암이란 바위가 있다. 동산의 아래에는 청심사당과 열녀비가 세워져 있었다. 경치가 좋은 곳으로 시인묵객이 음풍농월하던 곳이다.

   조선 태종 때 강릉부사가 임지를 떠나 서울로 돌아오다가 현지에서 애인으로 지내던 관기 청심을 이곳까지 와서 작별하려 하였는데 청심은 바위 위에서 몸을 던져 목숨을 버렸다고 한다.(이곳이 강릉과 서울 간의 교통로에 자리해 있었음을 알겠다.)

청심은 부사와 헤어지게 되면 원래 소속인 관기로 돌아가게 되고 다른 관원을 모셔야 하는 처지였을 것이다. 자기를 아껴주던 부사 영감의 사랑이 진짜라고 생각하여 부사가 관직을 그만 두고 서울로 가면서 자기를 독립시키는 조치를 기대하였으나 그것이 불가함을 알고 자결한 것으로 추측된다. 제도의 희생양이 된 것이다.

   그녀는 죽으면서 매우 큰 원망을 품었음직 하다. 그러나 조선 양반들은 무얼 했을까? 인간이 인간다운 본성을 발현하며 살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대신, 정려각을 지어 그녀의 정절을 칭찬하는 글을 지었으렷다. 강릉부사는 잘못이 없고 오히려 동시대 선비들의 부러움의 대상일 수도 있다. 정려각으로 억울한 죽음의 미화라니? 지금 눈으로 보니 말도 안 되는 미봉책이다. 그러나 그러나, 개명천지 현대에도 은근히 그때 강릉부사의 처지를 부러워하는 사람들이 있지는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