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2. 16:37ㆍ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공룡능선 한번 본 뒤 자나깨나 생각은 뾰죽바위 뿐
나 못잊겠네 날카로운 뿔들 하늘 향했네
천년 만년 오로지 설악가운데
그 자리에 기도하며 기다렸는가
바위 하늘 나무들 합심했구나 범접못할 신성의 영역
보기만 해도 고개가 숙여지네 쥐라기 공룡
백두대간 이어지니 안 갈 수 없네
오늘도 눈발 날려 신비롭구나
겨울공룡 : 2006년 1월1일 9시42분 필자 촬영
가을공룡 : 2004년 9월 25일 6시 25분 필자 촬영
그날, 즉 올해 첫날 아침 8시 반경 저와 BMW 그리고 송백회원 한 분, 셋이서는 아침 8시 반쯤 최대장님의 환송을 받으며 희운각을 떠나 무너미고개를 향했습니다.
대저 생명이란 무엇입니까? 중력에 대한 저항입니다. 그렇다면 대저 공룡능선이란 무엇입니까? 나락에 이르는 것처럼 까마득히 중력따라 내려갔다가 젖먹던 힘 짜내어 중력을 거슬러 다시 올라가는 것 그걸 대여섯번 이상 반복하는 겁니다. 즉 생명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생명은 슬픈 것입니까? 헛된 오르내림을 반복하다가 결국 스러지고 마니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은 슬프고 유한한 겁니다.
그러나 한 말씀 더 드린다면 그래서 생명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것은 불가능을 뚫고 어둠속에서 솟아 오르는 한 줄기 빛이자 허접스럽고 시들한 것들과는 반대방향으로 흐르는 반역의 힘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중력의 역방향 흐름이라면 중력의 방향은 순방향 즉 사망의 방향입니다. 그래서 공룡능선에선 몇 번 쯤 죽었다 깨어나며 자기의 생명을 믿고 또한 의지하며 통과해야 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생명을 확인하는 통과의례를 치룬다는 얘깁니다. 통과의례는 아프지만 그 의례는 우리를 정화합니다. 산행을 통한 깨끗해짐이란 저희 생명에 대한 선물 아니겠습니까?
그날 저희 둘, 저와 BMW는 생명의 고갈과 재충전을 몇 번 거듭한 끝에 공룡을 넘어 마등령에 설 수 있었습니다. 공룡을 넘는다 함은 우리를 까부러지게 해서 나락에 쳐넣으려는 중력에 대해 반역할 뿐 아니라 우리 생명의 존재에 대해 확인해 보는 행위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에 질서를 부여하는 힘이 곧 생명입니다. 저희 둘의 생명은 공룡능선을 통과하며 아주 충만해야만 했습니다. 죽었다가 거듭나길 여러 번 하는 바람에 저희는 고난을 겪은 다음 더욱 용감하고 튼튼해져 해피엔딩 속으로 퇴장하는 동화 속의 멋진 왕자처럼 행복을 맛보았습니다.
2006년 첫날, 새벽 1시 57분 56초(주의 : 제 카메라의 표준시각입니다. 이하 같습니다.)
한계령 휴게소의 매표소를 통과한 저는 제법 많은 수의 산님들을 좇아서 서북주능에 붙기 위해 아이젠과 스패츠로 감고 싼 다음 오른 손에 스틱을 들고 갑옷입고 검을 든 로마병정처럼 규칙적으로 발을 옮겨 놓으며 한계령 시작점의 얼어붙은 돌계단을 올라가기 시작했습니다. 산님들이 앞을 막아 새치기는 안됩니다. 천천히 따라갈 뿐. 생각같아선 산도깨비님이고 누구고 다 제치고 일착으로 대청봉에 뛰어오를 것 같은 자신감이 팽팽하게 몸속을 흐릅니다.
저 자신 그 옛날 이집트 왕이던 파라오(바로라고도 부름)의 사나운 말이 된 듯합니다. 파라오 왕실에서 아끼는 날랜 말은(아마도 오늘 날 사라브렛 종 Thoroughbred?) 너무나 힘이 세고 주인이 아닌 사람에겐 사납게 굴기에 그 고삐를 잡고 있기가 힘들 뿐 아니라 날래기가 보통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물론 모습은 멋있었지요. 구약성서에서 길들이기 힘든 자를 비유할 때 가끔 쓰입니다. 그 말이 가는 곳은 아주 멀 뿐 아니라 그 말이 가늠해 보는 목표지점은 아무리 산도깨비일지라도 상상 못하는 먼 곳이겠지요.
현실에선 검은 그림자들이 좁은 길에서 사라브렛의 발걸음을 막고 있습니다. 사실 파라오의 준마라면 날아서 앞으로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송백에선 날아가는 건 허용이 안됩니다. BMW처럼 땅에 붙어서 가야 합니다, 이것이 이곳의 룰입니다.(산도깨비는 가끔 날으는 반칙 저지르지 않나요?)
‘그렇다면 이분들이 쉴 때 나는 쉬지 않으리라.‘ 중청까지는 못먹어도 고go입니다. 가끔 병목구간에선 한솔산악회 회원들 뒤에서 조금은 쉴 수 있었습니다.
이번 신정을 계기로 하여 진행된 송백 백두대간 53차 산행에 제가 합류한 데에는 몇가지 제나름대로 생각해 둔 목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소위 제나름대로의 연구죠.
연구목적(1) 내가 써 놓은 시나리오가 맞는지 실험한다. 송백시간보다 1시간 앞서고 BMW보다 1시간
반 이상 빠른 엔진이 되어 하이맛을 버리고 페라리나 렉서스라는 닉네임으로 개명한다.
(2) 대청봉에서 그분을 잡고 매달려 새해 첫날 챙길 것을 미리 챙겨 놓는다.
(3) 거추장스럽게 크고 무거운 소니카메라가 산행에 불편하므로 잘 나가는 삼성카메라 #1으로
대체할 수 있는지 검증한다.
(4) 부수적으로 중요한 미션 중 하나는 BMW를 더 요리한다. 가능할 땐 대*산 등에서도 먹을
것을 찾아 본다.
급한 분들을 위해 연구 결론을 먼저 말씀드리죠. 가장 중요한 1번 미션은 제 시각 종주에 실패, 보스님에게 찍혔으니 0점이구요. 2번은 그런대로 80% 성공, 3번도 화질은 좀 떨어지나 쓸만하다는 결론으로 역시 80점. 4번은 언제나 가능하다는 자신을 얻었기에 100점 주어 봅니다. (0+0.8+0.8+1.0) 나누기 4하면 미션 달성은 정미 70%. 비관도 낙관도 말되 약간은 낙관 쪽입니다. 여기에 회비 35,000원을 곱하면 24,500원이 되고 나머지 10,500원이 제가 산행에 쓴 순 비용이 됩니다. (BMW는 목표가 공룡을 넘는 단순 무식한 것이었기에 목표달성율이 110%라고 떠든답니다. 그래서 오바달성율 10% 3,500원을 송회장님께 송금한다고 난리칠지도 모릅니다.)
쓸데 없는 돈 얘기 같은 건 빼라구요? 알겠습니다.
산행은 언제나 힘이 듭니다. 허연 입김을 뿜어내며 저는 4시26분 한계령에서 4.1km되는 이정표에 도착했습니다. 평균시속 겨우 1.64km, 걸음을 빨리 해야 합니다. 여기서부턴 길에 돌이 좀 덜 우락부락합니다. 아이젠이 눈이 별로 없는 돌위를 갈 땐 덜그럭거리며 발에 충격을 주니 벗어던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곧 눈길이 나오기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북능선엔 별도 달도 없이 아주 드라이합니다. 깊은 겨울 밤, 검은 그림자들의 머리에서 비추며 너울거리는 LED불빛만이 그들의 걸음을 따라 여름밤 반딧불처럼 흔들거립니다.
‘그렇다면 이분들이 쉴 때 나는 쉬지 않으리라.‘ 중청까지는 못먹어도 고입니다. 가끔 병목구간에선 같은 길을 가는 한솔산악회 회원들 뒤에서 조금은 쉴 수 있었습니다.
4시26분 한계령에서 4.1km되는 이정표에 도착했습니다. 평균시속 겨우 1.64km, 걸음을 빨리 해야 합니다. 여기서 부턴 길에 돌이 좀 덜 우락부락합니다. 아이젠이 눈이 별로 없는 돌위를 갈 땐 덜그럭거리며 발에 충격을 주니 벗어던지고 싶어집니다. 그러나 곧 눈길이 나오기에 그럴 수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서북능선엔 별도 달도 없이 아주 드라이합니다. 깊은 겨울 밤, 검은 그림자들의 머리에서 비추며 너울거리는 LED불빛만이 그들의 걸음을 따라 여름밤 반딧불처럼 흔들거립니다.
이제 많은 산님들을 제꼈는지 눈앞에 사람이 없는지라 아까보단 익숙하게 학습되는 엷게 눈덮힌 길을 파라오의 준마처럼 거칠 것 없이 달립니다.
6시 5분 중청대피소에 도착했습니다. 시계를 보니 제가 써 놓은 시나리오보다 15분 정도 늦은 것 같습니다. 쉬지도 못하고 대청봉을 향하는데 장난이 아니게 찬바람이 불어 제낍니다. 바람과 돌부리와 안경에 달라붙는 습기와 싸우며 허위단신 가파른 돌길을 올라 1,708m의 설악 정상에 도착한 시간은 6시 25분, 저 나름대로 할 일이 있기에 바람과 추위와 허기와 잠과 싸우더라도 10분은 필요했습니다.(434번 산행기 참조.) 오늘 해뜨는 예상시각은 7시 42분이라는데 구름낀 날씨 때문에 새해 첫 해오름은 못 보게 되었습니다.
중청으로 백하여 대피소에 도착한 시각은 6시 46분, 41분의 시간을 대청봉을 위해서 투자한 셈입니다. 이제 빨리 공룡을 지향하여 나아갈 때입니다. 내리막길을 헤치며 계속 내려가서 정각 8시 희운각 대피소에 도착합니다. 사람들이 아침식사를 하고 있는데 반가운 얼굴은 없는 것 같습니다. 조금 있으니 최대장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저는 구석에 앉아 얼어붙은 우유병을 열어 얼음우유를 조금 마시고 떡딱한 베이글 빵을 꺼내어 물어 뜯었습니다. 요 몇년 산에 자주 다니며 우리 동네에서 파는 한줄에 천원짜리 싸구려 김밥을 하도 사먹은 탓에 김밥만 보면 거부반응이 오기에 오늘은 건식으로 준비한 것입니다만 맛은 아시다시피 별로입니다.
그러나 저는 산정에서 들었던 말씀을 생생하게 기억하는지라 먹는 것에 대한 불평은 없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라.’는 엄한 명령.
‘먹는 것 입는 것 가지고 따지지 말라'는 말씀이었죠, 사실 공룡만 통과한다면 이 까짓 베이글 빵 네 덩어리는 희운각 개울에 던져 버려도 아까울 것 없는 심정이었습니다.
‘그분은 늘 나보고 큰 걸 구해내라고 하시는데. 내가 가족과 BMW말고 송백도 구해야 되나?’
9시 희운각 컷트라인이라는 회장님 말씀을 기억하며 9시가 되기엔 한 시간이나 이른 시각인지라 넉넉한 휴식을 취하며, 어느 정도 쉬었다 생각되어 곧 혼자라도 공룡으로 떠날 생각에 골몰하다가 드디어 최대장께 인사나 하고 가려는데 까치처럼 검은색 흰색으로 변복한 BMW가 그이 옆에 서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시각이 8시 25분 쯤, 잘 되었습니다. 같이 가면 될 것이니까요. 그가 이 이른 시각에 나타나리라곤 생각도 못했습니다. 늘 제 뒤에만 있으리라는게 저의 고정관념이었습니다. 최대장은 몸이 불편하여 저를 당신 대신으로 후미대장으로 임명한답니다. 제 왼쪽 어깨 멜방에 무전기까지 엮어 줍니다. 오늘 제가 송백의 인솔 장교가 되는 날인가 봅니다. 송백에서 A코스 타는 마지막 팀인데 저와 B, 터미네이터 3사람을 책임지랍니다.
‘예스 써, 명령만 내리십시오. 당신은 저의 주인.’
(송백에서 내리는 작위는 무얼까? 별 두개? 설마 그렇게 높은 걸 줄라구. 대위 정도로 만족하지 뭐. 하긴 나도 옛날엔 방위였을 때 대위 위였었으니까 이번엔 영관급으로 해 달랠까?)
누구나 제복을 입으면 개구리복 입은 예비군처럼 용감해집니다. 제가 그랬지요. 송백의 무전기가 뭐길래 그 무거운 것과 합체되는 순간 저는 잠깐 우쭐해졌습니다.
(너 BMW는 죽었다. 이 장교님의 무리한 명령을 거역했다간 봐라. 죽이진 않는다. 기합만 준다.)
‘고물차! 공룡 앞으로 갓!’
그 시각이 8시 30분.
먼저 간이화장실을 들르는데 BMW의 둔한 걸음이 딱딱한 플라스틱 계단을 버벅거리며 오르다가 아이젠 신은 발이 미끄러져 넘어질 뻔 합니다. 앞이 밝지만은 않습니다. 뒤뚱거리는 졸병에다 오늘 아침 해도 안뜨고. 책임은 무거워집니다. 그래도 가야죠.
무너미고개를 넘어 송백 아침도깨비들이 먼저 넘어간 공룡능선 쪽으로 향하려는데 송백의 깃발이 나무에 매어져 있었습니다. 그 처리를 묻기 위해 무전을 칩니다.
'여기는 하이맛, 김춘희대장 나와라, 오바.'
'김대장이다. 신임장교는 말해라. 오바.'
'무너미고개에서 송백표 붉은 디자인 발견. 별명 없으면 회수하겠슴. 오바.'
'오지랍 넓게 상관말고 산행이나 빨리 할 것. 오바.'
동행하신 별명 터미네이터는 아주 날씬하고 길쭉한 몸매에 공룡능선만을 위해서 제가 잘 아는 그분이 디자인한 신형 산행기계였나 봅니다. 브랜드는 벤츠정도이고요. 벌써 우리 앞을 떠나 신선봉 전에 한 번, 스틱을 주워 달라고 한 후엔 식사장소에서나 겨우 만나 볼 정도였습니다. 그분의 자유로움을 보건대 군대생활은 지휘권이 독립된 만주독립군에서 하셨을 듯 합니다.
거기 비하면 몸무게도 무겁고 느린데다 공룡능선 가기를 버거워하는 BMW나 저는 시를 읊고 술이나 마시며 음담패설도 가끔 나눌 줄 아는 로마의 뚱보 원로원 회원같은, 우리나라 구케의원같이 말싸움하는데에나 적당한 먹보 로보트들이었습니다.
첫번째 언덕을 그런대로 올라서니 신선봉입니다. 오전 9시 5분이 되었습니다..
우리가 같이 동행해서 경치 좋은 지점에 도착한지라 대화는 자연스럽게 이어지고 그가 미사여구를 먼저 꺼냅니다. 늘 듣는 좋은 얘기지만 저는 맞장구칩니다. 그의 이야기는 건성으로 들리고 돌들이 차려놓은 향연이 저의 주의를 빼앗았습니다. 그리고 경치도 저장하고 시간기록도 할 겸 언제나 멎었을 때 저는 카메라 셧터를 누릅니다.
여긴 아직 깊은 눈의 장이 서진 않았습니다. 강원도를 찾은 눈은 아직 깊이가 깊지 않아 산행에 큰 지장을 주지 않아서 우리에게 길을 내 줍니다. 그러나 나무들과 바위의 거죽을 적당히 덮은 눈은 회색의 하늘아래 하얀 비단이불처럼 경치를 빛내줍니다. 눈부시게 아름답다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공룡능선상 바위들을 분별없이 찍은 영상들 중 몇개를 '풍경사진 모음방'에 올렸는데 바위들이 정말 쥐라기 공룡의 이미지를 떠올리고 있음을 알았는데, 대모산님이 풍경사진방에 남긴 굴비글에서 가르쳐 주신 것이었습니다. 풍경사진 모음방 참조하십시오.)
제가 서두에서 약간 감정에 들떠 장황히 말씀드린대로 죽음의 계곡으로 내려섰다가 삶의 봉우리로 상승하기를 여러 차례 저희 둘은 몸무게의 무서움을 절감하며 절망적인 움직임을 계속했습니다. 누가 앞서고 뒤서는 게임 같은 건 필요없이 오로지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구식 탱크처럼 앞으로 전진할 뿐입니다. 제가 BMW보단 걸음이 빠를 거라는 사실도 공룡에선 맞지 않는 원리였습니다. 힘들긴 마찬가지인데 그는 제 앞에 서겠다고 희망합니다. 앞선 그가 제법 빨리 나아갑니다. 이제는 제가 그를 힘겹게 좇는 형편으로 산행이 계속되었습니다. 가끔 제 아이젠이 벗어집니다. 그의 안경도 문제가 있어 맨눈입니다. 눈뜬 장님은 아니고 그가 어떻게 가는지 저도 모릅니다.
10시 19분 희운각에서 2.8km 떨어지고 마등령까지 2.3km 라는 팻말이 있는 샘터에 도착했습니다. 샘물은 넘쳐 얼어붙었고 아주 매끄러워 그쪽으로 오지 말라고 합니다.
10시56분 1,275봉 밑에 도착, 계속 사진촬영은 계속되는데 BMW는 간간히 노트와 펜을 꺼내 끄적거릴 뿐 사진기록은 힘들어서 포기했나 봅니다. 그가 경치를 보며 던지는 상투적인 찬사도 줄어듭니다. (천하절경의 공룡을 감상하는 두 작자의 인생이 뭐 이렇게 아름다워선 안된다는 둥)
멋진 경치를 저라도 열심히 찍어 봅니다.
12시33분 나한봉표시 팻말이 있는 바위위에도착, 마등령까지 이젠 0.5km 밖에 안 남았습니다. 스토리는 이제 중간을 넘었습니다. 조금 가면 오세암 삼거리에서 오리가 반겨줄 터이고. 어쩌면 고생끝에 낙이 올 곳 같습니다만, 공룡능선 이후의 길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마등령이 가까워 오며 공포의 공룡은 끝나간다는 생각에 제 마음에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하릴없이 영어나 가지고 놀아 봅니다. 저 혼자서 B.M.W. 세자로 영문 삼행시를 지어 보며 힘든 걸음을 달래봅니다.
영어까지 가지고 장난치면서 위험한 너덜길을 통과 드디어 12시 53분 마등령의 나무오리 아래 섭니다. 지난 10월 2일 아침에 만난 뒤로 잘 있었나 봅니다. 다소곳한 태도로 수줍게 절 바라봅니다. 이제 좀 쉬자고 하며 그 아래돌밑 남동쪽에 바람을 피하며 앉았습니다. 귤을 까먹고 본부에 무전기로 마등령 도착을 신고합니다.
한껏 바람이 들어 간이 배밖으로 나오려는 하이맛, 본부와 다음과 같은 무전교신을 생각해 보며 반역을 꿈꾸기도 했습니다.
'여기는 미션 임파서블. 사령관 나와라.'
'사령관 보스다.'
'이제부턴 내가 지휘한다. 난 높은 데 거하는 하이맛이다. 자긴 애들을 집합시켜라.'
'헉...거시기 그거 송백무전기 맞나유?'(보스님의 목소리도 움츠러 든 듯...)
장난칠 여유마저 생기는 끝나가는 한적한 공룡길이었습니다. 무채색의 동양화같은 경치는 아직도 저를 죽여줍니다.
조금 언덕을 올라가서 또 하나의 마등령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9분, 이제는 내려갈 일만 남았습니다. 시간계산을 위해 머릴 굴려 봅니다. 앞으로 급히 내려가면 비선대까지 두시간 그후 주차장까지 한 시간 합이 세시간 잡고, 지금까지 쓴 시간은 벌써 11시간 9분 빨라야 14시간 9분입니다. 송백에서 주신 시간이 13시간이고, 제가 호언장담한 시간이 12시간이었는데 저의 계산착오였습니다.
(보스님 죄송합니다. 저는 송백같이 빠른 별에선 안맞습니다. 사실 저는 저멀리 여우가 사는 느린 별에서 온 어린왕자입니다.)
어쨌든 BMW를 엄히 내 몰았습니다. 그도 바람같이 움직입니다.그 바람에 제 아이젠 한짝이 벗어진 줄도 모르고 계속 갔습니다. 어디쯤 와 보니 벗어져 달아났더군요. 그냥 설악에 묻고 나머지 한짝마저 벗어서 가방속에 저장, 그 편이 훨씬 편했는데 그 시각이 오후 3시쯤이었나 봅니다. 비선대 도착 30분 쯤 전의 사건이 됩니다.
금강굴 옆을 통과했는데 본부에서 무전으로 어디냐고 묻습니다. 비선대 거의 다 왔다고 말씀드리며 15시35분 비선대의 상가터널을 통과합니다. 이제 무작정 뛰자고 BMW를 꼬여 보지만 못 뛴답니다.
4시 15분 25m 쯤 떨어져 걱정하고 계신 보스님의 모습을 보자 반가운 나머지 저는 거수경례로 산행종료를 보고했습니다.
'상황 끝. 무전기 반납합니다. 제 예정보다 두시간, 송백시간에선 1시간 15분을 낭비했습니다. 오늘 산행을 인도한 송백의 장교, 하이맛을 벌하소서'
우리 회장님은 인자하신지라 용서하셨습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으실 것 같습니다.
5분쯤 늦게 BMW가 도착할 때까지 저는 버스 문앞에서 기다립니다. 기다리던 님들을 정면으로 돌파할 낯이 없는 저는 그를 앞세우고 버스안으로 기어듭니다.
'자기가 먼저 들어가라. 난, 난...'
우직한 BMW, 적들의 시선도 무시한 채 대담한 움직임으로 '죄송합니다' 한마딜 날리며 1호차 뒷편에 우리 자릴 확보합니다.
저는 언제나 처럼 꺼두었던 휴대폰을 켜고 하마부인이에게 살짝 보고합니다.
'밥 먹었나? 먼저 자라. 동부전선 이상무다.'
'서방님, 서부전선도 이상무이와요.'
(그래야지. 그런데 웬 꾀꼬리 소리가 우리집에서 나나? 내가 시방 1번 버튼을 길게 누른 것 맞는겨?)
우리는 늦은 것이 부끄러워 자리에서 조금 버벅거리다가 떡국이 맛있다기에 슬그머니 버스 밖으로 나가 식사장소로 갔습니다. 김대장과 몇 분이 반겨줍니다. 9시쯤 헤어졌던 터미네이터도 7시간 더 넘었지만 반갑게 만났습니다.
떡국 한 그릇을 먹고 더 주시는 걸 저는 사양하는데, BMW는 넉살 좋게 한 그릇 더 청합니다.
(BMW, 자기말야. 더 먹지마. 우리 둘이서 우리나라와 대의를 구하되, 밥은 적게 먹으라는 그분의 당부를 헌신짝처럼 버릴거여?)
그는 예의 그 순진하게 보이면서도 죽여주는 미소를 날리며, 설마 설날 떡국을 누가 빼앗기라도 할까봐서인지 재활용도 안되게 얇은 플라스틱 국그릇을, 숟가락까지 든 두손으로 꽉 잡은 채 씩 웃었습니다.
'죽을 때 죽더라도 먹을 건 먹어야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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