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2. 16:43ㆍ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오랜만에 산행에 참여했습니다. 지난 2월 4-5일의 무박산행후 한달 반정도를 산에 가지 않고 놀고 먹다가 백두대간 정기산행에 참가한 것입니다. 그 동안 해외에 좀 다녀오느라(2월 15일-3월 6일) 산에 갈 짬이 없었기도 하고 지난 주(12일)엔 억지로 가려면 갈 수도 있었으나 여독이 덜 풀린 것 같아 쉬었던 것입니다.
해외여행을 하고 왔다고 하니 많은 분들이 궁금해 하시기에 간단히 저간의 사정을 말씀드립니다. 그 동안 저는 몇 번 유럽에 다녀왔었기에 별로 갈 생각이 없었는데 하마부인과 대학졸업반인 아들녀석이 꼭 유럽구경을 하겠다는 겁니다. 그리고 제가 길을 아니 앞장서서 안내하라는 성화였습니다. 겨울이 되면 비철인지라 항공료도 싸고 숙소도 저렴할 거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겨울에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월 15일부터 암스테르담-런던-로마-피렌체-루체른-파리-뮌헨-암스테르담을 어우르는 긴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비행기표는 싼 것으로 구할 수 있었고(왕복 1인 78만원) 숙소는 한국인 민박(숙소와 아침 저녁 식사제공 1인 1일 20유로)을 주로 이용하였습니다. 유명 도시들을 토끼뛰듯이 주마간산으로 돈 이유는 하마부인이 원체 본 것이 없기에 우선 유명지를 헤맬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제한된 시간과 경비 속에서 여행은 우리 가족에게 많은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열악한 환경의 민박집에서 고생하기도 하고 밤기차에서 추위에 떨기도 했습니다. 런던에서는 아침 3시에 나와서 싼 비행기가 출발하는 류튼 공항으로 버스를 타고 가야 하기도 했습니다. 비와 눈도 잦았고 기온도 낮았습니다.
유럽에 마침 한파가 내습하여 보통 때보다 날씨가 훨씬 춥고 비나 눈이 잦아서 여행의 어려움은 더 했습니다. 집을 떠나서 재미있는 여행을 하려던 것이 집을 떠나 고생을 잔뜩 한 꼴이 되고 말았습니다. 스위스의 루체른에서는 10,000피트(약 3,000m)가 되는 눈덮힌 알프스의 한 봉우리에 비싼 돈을 내고 곤돌라를 타고 올라갔으나 구름 때문에 기대했던 멋진 경치를 볼 수 없어 안타깝기도 했습니다. 하마부인은 추위 때문에 여행내내 감기에 걸려 고생해야 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이 많은 이때 배낭여행이지만 해외에 갔다와서 고생만 했다고 여쭈워 보았자 이해가 안 되시는 분들도 많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 점에서 조심스럽습니다만 제 기억에 결단코 편안한 여행은 못되었습니다.(전에 제가 갔던 패키지 여행은 그런대로 편안했었습니다.) 고생했던 기억이 어느 정도 가셔지면 그 고생은 다시 즐거운 추억으로 변하리라고 생각은 합니다. 고생한 만큼 배우는 것, 그것이 여행이 주는 선물이라고 주장해 봅니다.(여행 못가시는 분들 죄송합니다.)
2월4-5일의 무박산행에 밧줄 잡으랴, 스틱잡으랴, 사진찍으랴 오른쪽 팔을 너무 혹사한 나머지 팔의 인대가 늘어나 그 동안 통증을 안고 있었습니다. 치료할 사이도 없이 무거운 짐을 끌고 유럽을 휘젓고 다니느라 통증은 멎지를 않았습니다. 오기로 버티며 낫기를 기다리는데 산행을 하려는 날 쯤에야 겨우 제법 나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전철에서 내려 호텔앞 너구리소년상의 말쑥한 자태를 보는 순간 온갖 시름은 사라지는 듯 합니다. 오늘은 BMW가 조카 결혼식 때문에 산행에 불참한다 하니 좀 쓸쓸한 기분이 들기는 하나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반가웠습니다. 그러면서도 내심 그 동안 너무 놀고 먹은 듯하여 죄송하기도 하고 어려운 산행에 적응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습니다.
7시가 좀 지나 버스는 동쪽으로 동쪽으로 달려갑니다. 클린턴휴게소에서 잠시 정차후 오늘의 산행 들머리인 구룡령을 향하여 계속 운행하고 산님들은 가벼운 졸음에 잠깁니다. 저도 눈을 감아봅니다만 잠은 안 오고 여러 가지 상념들만 떠오르고 그 생각들은 산행내내 지워지지 않고 업이 되어 저를 따라오며 놓아주지를 않았습니다.
봄이 되면 찾아오는 가벼운 우울증과 새봄을 맞아 새로운 시작을 약속하라는 내면의 명령과 겨울의 긴 잠에서 깨어나지 않으려는 육체를 얼버무려 안은 채 10시 24분 해발 1,013m의 구룡령에 엉거주춤하게 섰습니다. 저는 이러한 복합적인 문제들을 슬기롭게 조화시켜 산행의 끝 쯤엔 행복한 왕자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행복한 왕자가 못 될지라도 생활에 대한 전반적인 태도를 좀더 낙관적이고 적극적인 방향으로 이끌 자세가 갖추어질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번 산행에 거는 저의 기대였습니다.
하루의 산행에 거는 기대 치고는 제법 큰 기대를 품고 기계적인 발걸음을 내딛습니다. 오랜만에 밟아보는 산길은 제법 미끄러웠습니다. 편안함에 물들었던 몸은 잘 움직여 주질 않습니다. 된비알을 가끔 미끄러져 가며 올라가는데 첫 번째 봉우리 쯤에서 산님들이 아이젠을 착용하기 시작합니다. 저도 잽싸게 아이젠을 차고 산행을 계속합니다.
11시 9분 약수산정상 간판 앞에 섭니다. 대모산님이 열심히 기록을 하고 계십니다. 약수산을 내려가는데 아이젠이 이제는 걸리적거리기에 어느 정도 가다가 풀었습니다. 그러다보니 가끔 눈이 얼어붙어 미끄러워서 어려운 길이 나타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전반적으로 아이젠없이 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음의 목표는 약수산에서 약 5km 떨어진 응복산입니다. 응복산은 해발 1,360m의 높이로 오늘 산행에 가장 높은 곳이 되고 가장 중요한 지형지물이 되는 곳입니다. 1,280봉, 1,261봉, 마늘봉 등을 차례로 통과하였으나 깊은 생각에 빠진 저는 그들을 자세히 구별해 볼 능력이 없었습니다. 발걸음은 기계적으로 움직이되 생각은 제 삶의 현재를 깊이 반추하고 있었습니다. 봄이 되면 찾아오는 이유없는 이 무력감과 그 반대편에서 솟는 강렬한 희망의 기대감을 어떻게 조화시켜야 할지 오늘 산행의 전 시간을 투자해 보렵니다.
봄이 왔습니다. 따사로운 햇볕에 눈이 녹아서 길을 진흙탕으로 만들고 얼굴로 불어오는 바람도 그렇게 차갑지가 않습니다. 산비탈 응달엔 아직도 눈그림자가 남아있지만 양지바른 산등성이에선 나무들이 겨울 옷을 벗을 차비를 하고 있습니다. 낙엽속엔 얼어붙은 땅이 아직 미끄럽지만 조만간 이들도 봄의 기운에 항복할 것입니다. 그러다가 앙증맞게 핀 노란 복수초 꽃을 발견하곤 제 생각의 얕음과 어지러움을 부끄럽게도 여겼습니다.
미끄러운 길을 오르느라 제법 고생을 하며오후 1시 13분 응복산에 도착합니다. 산님들이 식사를 하느라고 분주하고 조망은 멀리까지 나 있습니다. 돌백님의 옆에서 식사를 합니다. 밥은 없고 행동식 비슷하게 싸 온 우유와 단팥빵을 꺼냅니다. 라디오에서 한일간의 야구경기가 중계되고 산님들도 관심이 대단합니다. 현재 스코어는 영대 영, 결과가 궁금하지만 오늘 목표지점까지 갔다 오려면 서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얼른 식사를 끝내고 산아래로 빠르게 내려갑니다.
1시 42분 하산길로 정해 놓은 삼거리에서 들국화님이 기다리다가 남쪽 목표까지 빨리 다녀오라고 격려합니다. 이제 양지바른 쪽의 길은 눈과 얼음이 녹아서 질척질척합니다. 이게 걸음을 한껏 어렵게 합니다. 만월봉을 내려가다가 결국 낙엽을 짚는데 그 밑의 얼음 때문에 미끄러져서 살짝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위엔 진흙물이 있어 바지를 조금은 버리게 되었습니다. 낙엽을 주워 최대한 씻어낼 수 밖엔 없었습니다. 사람이 다니는 길은 진흙밭인지라 그길을 피해 낙엽위로 가다가 생긴 해프닝이었습니다. 이후 내내 기온이 오르고 길 표면이 녹아서 진흙길이 되고 그 위를 걷는 것을 어렵게 해주었습니다.
오후 2시 37분 반환점에 도착하였습니다. 이 이상 전진할 시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1천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어이없는 간판이 서 있었습니다. 법은 엄하되 지키기가 어려우면 국민은 거짓을 행하게 되고... 걱정입니다.
이제 유턴하여 북으로 향합니다. 가능하면 빨리 움직이려 하나 몸이 말을 안듣는 것 같았습니다. 또한 왼쪽 다리의 근육이 약간 당기기 시작합니다. 다리를 살살 달래기 위해 천천히 걸어야 했습니다. 3시 44분 통마람골로 탈출하는 삼거리에 도착하었습니다. 초이스님이 기다리다가 사진을 찍어 주십니다. 잠시 쉰 다음 좌로 틀어 하산하기 시작하는데 구름체님 이하3분의 여성분들도 같이 하산하십니다. 맨 뒤는 월인님이 마지막 분들과 오고 계신다고 합니다.
가파른 하산길을 내려오는데 여기야 말로 물이 흘러 길이 진창입니다. 조심해야 했습니다. 무사히 가파른 언덕을 거의 다 내려왔는데 초이스님이 무언가를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복수초’였습니다. 무식한 저는 이름은 모르지만 땅 끝에 내밀어서 핀 3송이의 작은 노란 꽃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봄의 실체를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봄은 제 주위에 어정쩡하게 맴돌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사실로서 제 앞에 나타난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봄은 제게 부활하였습니다. 저는 이 봄의 화신을 카메라에 담아 보려고 셧터를 눌렀습니다. 땅 끝에 붙어있는 여린 생명인지라 카메라에 잘 담아지진 않았습니다만 그 앙증맞고 작은 꽃들이 저의 마음을 열어젖혔습니다. 제 고민들은 약간은 멀어지고 제 삶은 약간은 밝아졌습니다. 산행이 빛을 발했나 봅니다. 노란 복수초를 발견한 부활의 시각은 오후 3시 57분이었습니다.
(후기) 5시 조금 넘어 버스에 도착하였고, 야구는 0:6으로 석패하였습니다. 자운영님의 설명으로 그 꽃의 이름이 복수초임을 확인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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