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060820 제5차 백두대간 지리산 웅석봉 산행기 : 하이맛 웅담수 마시더니 반쯤 사람이 되다.

2006. 10. 12. 16:55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산행지 : 백두대간 지리산 웅석봉

코스 : 밤머리재-845봉-왕재 삼거리-샘터-웅석봉-무명봉-능선-내리 저수지

산행시간 : 10:50 - 14:34(3시간 44분)


지리산의 동쪽에 있는 산청의 웅석봉을 다녀왔습니다. 백두대간길을 지리산의 천왕봉에서 싹둑 자른다면 너무나 섭섭한지라 천왕봉에서 동쪽으로 연장하여 중봉과 하봉을 거쳐 왕등재->밤머리재->웅석봉으로 연결하면 지리산 태극종주코스도 되고 백두대간도 좀더 늘여서 즐길 수 있습니다. 이래저래 물맑고 산높다는 산청고을의 웅석봉은 평소에도 가보고 싶은 산이었습니다.


그래서 산행을 끝내고 보니 평소의 대간산행에 비하면 거리로 보나 시간으로 보나 조금은 짧고 그래서 약간은 아쉬운 산행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정상 아래 350m 떨어진 샘에서 흐르는 물을 마시고 잠시 곰과 사람의 인연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었습니다.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신화를 보면 사람이 되고 싶어 한 곰이 쑥과 마늘을 먹고 21일을 참는 중에 웅녀로 환생하여 환웅과 결혼해 단군을 낳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곰은 어쩌면 우리 민족의 어머니이자 우리들 모성의 본원이라고도 생각됩니다. 그러한 곰의 이름을 그대로 간직한 산이 웅석봉입니다.


웅석봉의 이름부침에도 이러한 민족신앙과 자연에 대한 존경심이 스며들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맛도 없는 쑥과 마늘을 먹으며 인간이 되리라는 희망 하나로 견디는 곰의 끈질긴 인내심도 제 몸속 어딘가에 있다고 믿어 봅니다. 또한 어려운 시간을 견디어야만 무엇을 이룰 수 있다는 통과의례도 백두대간을 가는 저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져 줍니다.


곰과 같이 끈질기게 또한 어려운 시간을 지내야만 백두대간 완주라는 월계관을 쓰게 되겠지요. 그러한 끈질긴 산행의 한 페이지가 8월 20일 다시 잠실벌에서 시작됩니다.   


8월 20일, 여름의 끝 쯤인지라 저는 이날의 산행을 통하여 지나간 여름날을 결산하고 닥아오는 가을을 맞는 결의를 굳게 해야만 했습니다. 10시 50분 산청의 밤머리재에서 시작된 산행의 초장 동안 묵묵히 걸으며 저는 이번 여름을 다시 반추해 보았습니다만 무엇 하나 제대로 이루어 놓은 것이 없는 걸 깨닫고 한심한 저를 질책했습니다.


2006년 여름방학의 시작에 저의 계획은 제법 다부진 것이었지요. 송백의 백두대간 산행에 개근은 물론 못 간 구간에 대한 자습 산행과 한 가지 계획하던 일을 끝내는 것이었는데 결과로는 참패였습니다. 송백의 산행에 좇아다닌 것 말고는 별 소득이 없었습니다. 물론 그럭저럭 먹고사는 것은 빼고 말입니다. 저에게 사실 핑계는 많았습니다.


7월달엔 비가 너무 왔고, 8월엔 오십견이 악화되어 병원에서 물리치료 받고 한의원에서 침 맞느라 시간을 많이 빼앗겼습니다. 8월 들어서는 날씨가 너무 더운 것도 저의 게으름을 변명하는 한가지 핑계거리였지요.


산행의 초반에 저는 독일의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유명한 시 ‘가을날’을 떠올려 보앗습니다.


가을날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위대했습니다.

당신의 그림자를 해시계 위에 얹으시고

들녘엔 바람을 풀어 놓아 주소서.


마지막 과일들이 무르익도록 명(命)하소서

이틀만 더 남국(南國)의 날을 베푸시어

과일들의 완성을 재촉하시고, 독한 포도주에는

마지막 단맛이 스미게 하소서.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혼자인 사람은 그렇게 오래 남아

깨어서 책을 읽고, 긴 편지를 쓸 것이며

낙엽이 흩날리는 날에는 가로수들 사이로

이리저리 불안스레 헤매일 것입니다.      


가을을 맞으면서 여름동안 결실없이 보낸 저같은 사람의 쓸쓸해지는 마음을 표현한 시 같습니다. 이 시는 자연과 사람을 대비시키면서 가슴 뭉클한  사실을 이야기 해 줍니다. 자연은 정해진대로 할 일을 계속하여 이제 여름에 이루어 놓은 결실에 마지막 터치인 열만 좀 가하면 가을맞이에 손색이 없을 듯 합니다.

 

그런데 사람은 제 할 일을 다 못한 것 같습니다. 집을 마련하지도 못했고 잠못들어 책을 읽고 편지나 쓰며 헤매는 꼴이 확실한 행동 하나 없는 허깨비인 것입니다.


그분께, ‘지난 여름은 위대하였습니다.’ 라고 아뢸 그런 결실이 없는 저는 묵묵히 웅석봉으로 가는 능선을 걸어갈 뿐이었습니다. 저의 답답한 마음처럼 봉우리와 능선은 구름속에 숨어 나타나지 않습니다.  


10시 50분 밤머리재를 떠나 처음의 가파른 비탈을 오르니 쉽게 능선에 올라설 수 있었습니다. 정식 비도 아닌 안개와 비 때문에 일단 배낭커버를 씌우고 전진합니다. 서쪽으로 바라보면 애인처럼 보고싶은 천왕봉이 보여야 하는데 구름 속에 오리무중입니다. (대체 천왕봉이 거기 있기는 한 겁니까?)

 

한시간 쯤 지난 11시 58분 왕재라고 표시된 삼거리에 도착합니다. 이곳은 해발 925m의 고지로서 밤머리재에서 3.3km 전진한 지점이고 웅석봉까지는 2km 전이라고 이정표 쇠말뚝에 표시되어 있었습니다.


약간 오르막을 올라 한참을 가니 다시 삼거리가 나오는데 여기서는 왼쪽 아랫길로 가야만 웅석봉으로 가는 바른길이 됩니다. 마침 송백의 붉은 색으로 된 진행방향 알리는 장방형 깃발이 걸려 있었습니다.


조금 더 가니 헬기장 공터가 나오고 여러분의 송백님들이 식사를 하거나 쉬고 있었습니다. 정상 진행방향에서 오른쪽 아래 50m 지점에 있는 샘으로 물을 마시고 뜨기 위해 내려갔습니다. 여러 분들이 와서 물을 마시는데 플라스틱 바가지 두 개 중 하나가 깨져서 물을 뜨거나 마시기에 시간이 걸렸습니다. 이때가 12시 40분이었습니다.


저는 물을 떠서 마신 다음 수통에 채웠습니다. 수통엔 남은 물이 있어 반만 채우면 되었지만 바가지가 새는 바람에 수통을 다 채우지 못하고 다음 분에게 바가지를 양보했습니다.


오늘 이 물을 마시는 것에는 저 나름대로 큰 의미를 부여해 보았습니다. 하나의 통과의례라고나 할까요. 한 여름의 부진함을 다 털어버리고 새사람으로 태어나는 것 말입니다. 인간이 되고 싶은 곰이 동굴 속에서 달게 먹었던 쑥과 마늘처럼 이 물을 제가 달게 먹고 새로운 제 자신으로 태어난다는 그런 신화같은 이야기입니다.


깨진 바가지로 어설프게 입속으로 샘물을 흘려 넣을 때 신화는 사실이 되는 듯 했습니다.


‘아, 이제 나도 사람이 되었구나.’

‘이 동물적인 충동과 어리석은 망상과 헛된 희망에 달뜨는 바보같은 생활도 이제 끝, 새사람, 달관한 자가 되었도다. 웅석봉 곰샘아 고맙다.’


물을 달게 마시고 다시 헬기장으로 올라와 약 15분 간 지난번 만수봉 산행때 처음 인사를 하고 지내는 ‘정삿갓’님과 같이 식사를 했습니다.


12시 55분 정삿갓님과 함께 멀지 않은 정상을 향해 떠났습니다. 8분후인 13시 3분엔 정상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정상석은 정사각형의 제법 넓은 검은 돌판인데 웅석봉이라고 한자로 씌어져 있고 1,099m라는 글씨 외에 곰이 한 마리 그려져 있는 것이 특이했습니다. 단군신화가 다시 한 번 생각켰습니다.


정상에서 사진을 몇 장 찍고 두 사람은 무명봉 쪽으로 하산하기 시작하여 걸음을 빨리 했습니다. 한참 가는데 여성 산우 한 분을 추월하게 되었는데 아무래도 글과 사진으로 많이 뵈온 ‘순수님’인 것 같아 인사를 드렸는데 그분이 맞았습니다. 혼자서 너무 열심히 가시느라 그렇게 제가 중요시하는 샘에도 안 들르고 오셨다고 합니다.


저희는 능선을 이루는 조그만 바위에서 쉬며 제가 떠온 물을 순수님께 드렸습니다. 그리고 '사람이 되는 물'이라고 농담도 해드렸습니다. 순수님 말씀이 보통 대간을 목요팀으로 가시는데 목요 산행은 더 힘들다고 말씀하시며 그래서 오늘도 급히 가신다고 합니다. 제가 가늠해보니 오늘 저희의 속도는 중간 이상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나누며 무명봉을 지나고 능선을 지나고 한참 내려가니 내리 저수지와 그 옆에 서있는 버스가 조그맣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드디어 14시 34분 본부인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걸어내려온 웅석봉을 올려다보니 아직 구름속에 싸여 있는데 제법 험하게 보였으나 끝내 그 모습을 들어내진 않았습니다.  


약간은 일찍 내려온 편인지라 2호차도 있었습니다.


(후기)

구름속에서 웅석봉을 밟았습니다. 볼거리도 없고 산행거리로도 약간은 부족한 산행이었습니다. 그러나 곰샘의 물을 먹고 새로운 결의를 다진다는 의미를 찾았습니다.


2호차가 떠난 뒤 월인님의 생일축하가 있었나 본데 그런 낌새를 전혀 못채고 3시반에 서울로 향했습니다. 다행히도 2호차의 한 자리를 차지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낯설은 2호차 속에선 군중속의 고독이 저를 둘러싼지라 그분을 찾았습니다.


그분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오늘 저는 곰이 인간되는 물을 마셨습니다. 정말 인간이 되었나요?’


그분께서 답하십니다.

‘아직 멀었다. 몸은 인간인데 머리는 아직이니라.’


‘제가 먹는 한 살림표 생식 때문이옵니까? 그속에 쑥도 들어 있아옵니다.’


‘一切唯心造일체유심조, 생각하기 나름이니라.’


알듯말듯한 그분의 답변, 어쨌든 웅석봉을 넘은 저는 이제 씩씩하게 가을과 맞서렵니다.

출처 : 송백산악회
글쓴이 : 하이맛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