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 10. 12. 16:56ㆍ백두대간 산행기 Baekdu Trails
산행지 : 백두대간 지리산 벽소령, 토끼봉
코스 : 음정마을-바람재-벽소령대피소-형제봉-명선봉-토끼봉-화개재-뱀사골-반선
산행시간 : 10:55 - 19:05(8시간 10분)
9월의 첫 일요일, 올해 들어 송백에서 지리산 가는 중 다섯 번째입니다. 이번 산행은 먼길이기에 잠실출발이 6시 30분입니다. 평소보다 30분 일찍 잠실로 가기 위해 5시 20분 집을 나섭니다. 오늘은 기다리던 백두대간 길 중 지리산의 중간허리를 지나가야 하는 날입니다. 음정에서 출발하여 지난 7월 2일 갔던 임도로 해서 벽소령에 도달한 다음 우측으로 돌아 대간길을 따라 형제봉->명선봉->토끼봉을 지나 화개재까지 간 다음 우측으로 틀어 대간길에서 탈출하여 지난 8월 6일 갔던 뱀사골 계곡으로 해서 반선으로 내려오는 제법 긴 산행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전체 길이는 접근로, 탈출로와 대간길을 합하여 약 24.5km를 걸어서 넘어야 합니다. 송백에서 재단한 백두대간길 구간 중 두 번째로 긴 구간이라고 합니다.(첫 번째는 대관령->선자령->진고개 구간이라고 합니다.) 따라서 피와 땀과 눈물이 필요한 날입니다. 오늘의 주제는 구름에 달가듯이 무념무상으로 오래 걷는 것입니다. 걷다보면 멋진 경치도 나올 것이고 멋진 해결책도 나올 것이었습니다.
산행하며 걷는 동안에 생각이 정리된 경험이 가끔은 있었습니다. 산행을 하다보면 육신은 중력에 매여 힘들지만 정신은 제 자유를 찾아 시간과 공간에 제약되지 않고 훨훨 날아다닐 수도 있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정신을 해방시키려면 혼자서 아무 생각없이 정처없이 걸어야 합니다. 양탄자같이 푹신한 숲길도, 험하디 험한 경사지 돌밭도 차별하지 말고 똑같은 마음으로 즐겁게 걸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제가 이렇게 달관한 경지에 이르렀다면 무슨 걱정이 있겠습니까만은. 우리들이 살다보면 이상과 현실의 부조화는 언제나 있게 마련이겠지요?
오늘 산행의 하이라이트로 잡고 싶은 벽소령은 한자로 碧宵嶺이라고 쓴 답니다. ‘푸를 벽’자는 알겠는데 ‘밤 소’라는 글자는 처음 보는 것 같습니다. 제 나름대로 뜻을 풀어보면 ‘푸른 밤 고개’라는 낭만적인 이름을 가졌습니다. 그래서인지 ‘벽소명월’을 지리산 10경 중 하나로 꼽고 있었습니다. 벽소령에 떠서 아름답게 빛나는 달은 그 빛깔이 푸른색이어서 ‘푸른 밤이 아름다운 고개’라는 이름과 매치되는 것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사실 깊디깊은 가을밤에 산 전체를 검고 푸르게 물들이며 교교하게 떠있는 달을 감상한다는 ‘벽소명월’을 제가 만난다는 것이 제겐 한낱 희망사항이자 꿈인지도 모릅니다. 그 장소에 갔더라도 필요한 시각, 달이 뜰 시각에 있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주어진 시간인 한낮(실제론 9월 3일 13시 16분)에 벽소령을 지나가며 상상속에 달빛을 비추어 보는 수 밖에 없는 셈이었습니다.
벽소령은 지리산 남쪽의 하동군 화개면에서 지리산 북쪽의 함양군 마천면을 잇는 임도가 지나가는 고개입니다. 임도가 구불구불 나있는 걸 보아서 지리산을 남에서 북으로 넘는 길 중 비교적 험하지 않은 고개라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넘었을 것이고 그분들 중 어떤 이는 밤에도 이 고개를 넘었는데 20세기 중반의 어느 달 밝은 밤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에 넋을 잃고 그 자리에 얼어붙어 걸음을 떼지 못했다는 전설 하나 쯤 있을 것만 같습니다.
21세기, 2006년 9월을 살고 있는 지금의 저로선 만들어내기 힘든 프로젝트입니다. 달이 밝은 음력 보름근처 맑은 날에 2-3일 아무 데도 구속받지 않는 시간을 확보한 다음, 지리산으로 달려갑니다. 어느 길이던 타고 벽소령에 올라 거기서 일박하며 달이 뜨길 기다려야 하겠지요. 그러나 송백의 산행에 길들여져 기계적으로 대간길이나 따라다니는 제가 어찌 그런 신통한 계획을 꾸밀 수 있겠습니까? 우선 뒤로 미루어 놓겠습니다.
‘벽소령의 푸르른 달빛아! 내 너를 이리도 그리워 하거늘!’
이미지를 위해 퍼온 사진(덕유산입니다.)
6시반이 채 안된 이른 아침, 잠실의 아침도 가을의 손안으로 들어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높아진 하늘엔 구름이 가볍게 떠있고 공기는 시원합니다. 잠실에 도착해서 주위를 둘러보니 주상복합인 듯한 두 개의 높은 건물이 눈앞에 새로 지어져 있었습니다. 날카롭게 각이 져서 하늘을 향하여 비상하려는 듯 솟아오르는 두 건물의 위를 쳐다보니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흰구름이 옅게 흐르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높고 말이 살찐다는 가을이 드디어 온 것입니다.

잠실의 가을하늘 1

잠실의 가을하늘 2
6시반 3대의 버스가 잠실벌을 떠나 지리산을 향합니다. 버스는 9시경 인삼랜드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가 여느 때처럼 88고속도로의 지리산 나들목으로 나가서 인월로 해서 오늘의 산행들머리인 음정마을로 느릿느릿 닥아 갑니다.
10시 55분 음정마을에 버스가 서고 송백님들이 다 내려서 산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약간 가파른 소로를 따라 산등성이를 오르며 한참을 전진하니 지난번 갔던 임도와 합쳐집니다. 여기부턴 비교적 완만한 길이 지루하게 계속됩니다. 지난 7월 2일 갈 때와는 여러 가지가 달랐습니다. 우선 길가에 피어있는 꽃의 수효가 적어지고 공기 속의 습기가 적어서 쾌적합니다. 그땐 하늘이 검은구름으로 무거웠는데 오늘은 구름의 빛깔이 희고 옅습니다.
12시 12분 임도옆 작은 폭포에 도착하여 한숨 쉽니다. 폭포에는 이끼까지 끼어있어 뱀사골에서 유명한 이끼폭포를 닮았으니 감히 ‘짝퉁 이끼폭포’라고 명명해 보았습니다.(물론 그 넓이나 수량 등에선 진짜에 필적이 안됩니다만)

http://222.122.158.243/fotoAlbum/49512/105440/105440_20069812365_0.jpg
짝퉁 이끼폭포 : 진짜를 그리며...
진짜 이끼폭포(자운영님 촬영)를 보시려면 다음 주소를 클릭하십시오.
http://kr.img.blog.yahoo.com/ybi/1/38/5e/angaebenun/folder/3/img_3_256_3?1154992767.jpg
가끔씩 잠시 휴식하며 임도를 따라 계속 가다보니 12시 30분 쯤 벽소령대피소로 질러갈 수 있는 삼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벽소령대피소로 질러갈까하다가 오늘은 정규코스를 밟기로 하여 바람재 쪽으로 곧장 전진합니다. 그래서 12시 59분 바람재, 또는 신벽소령으로 불리우는 고개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 좌측으로 가면 세석대피소까지 5.2km, 우측으로는 벽소령대피소까지 1.1km라는 나무표지판이 나무말뚝 위에 붙어 있었습니다.
저는 발걸음을 우측으로 돌려 벽소령대피소를 향하며 대간길에 오늘 처음 들어섰습니다. 17분이 지난 오후 1시 16분에는 그리던 벽소령(대피소)에 도착할 수 있었습니다. 표면을 검은색의 방부재로 처리한 목조건물이 반겨주지만 ‘벽소령’이라는 낭만적인 이름이나 ‘벽소명월’이라는 지리10경 중 하나인 경치를 보여주기에는 날이 너무나 밝았습니다.
이상과 현실에는 괴리가 있는 법이었지요. 원하는 것은 이상이었지만 실제로 도달하는 곳은 언제나 조금은 조악한 현실이었답니다. 푸르른 달빛에 물든 벽소령의 산그림자가 제가 갈구하는 이상이라면 대낮의 햇볕에 초라하게 들어나는 검정색 대피소 건물은 벽소령의 냉엄한 현실이었습니다. 아쉽지만 달밤의 벽소령을 보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어 희망의 갈피에다 꽂아 두었습니다.

벽소령 대피소 1

벽소령 대피소 2
오후 1시가 지나고 이제 배가 고파옵니다. 1시 30분 쯤, 카우보이님과 다른 동료 두분, 저까지 넷이는 형제봉 근처 전망이 좋은 바위위에서 점심식사를 했습니다.(먼저 식사를 마치신 어울마당님께서 찰밥과 더덕무침을 공급해 주셔서 맛있게 먹었습니다.)

형제봉 가는 길에 두 바위 틈새를 지나다.
능선길을 가다 보면 가끔 나타나는 바위위에서는 나무들의 방해를 받지 않고 먼 경치를 조망할 수 있었기에 잠시 머물며 지리산의 원경을 구경하고 카메라에 저장합니다. 하늘엔 옅고 흰 구름이 넓게 퍼지거나, 솜같은 구름이 뭉쳐서 둥둥 떠다닙니다. 그 바탕의 하늘은 높고 푸르러 가을빛이 완연했습니다. 덥고 습한 여름이 이제 사라진 것 같습니다. 멀리 겹쳐서 펼쳐진 산들을 거침없이 바라보게 되니 마음속까지 시원해 집니다. 그렇게나 시원한 가을날을 기다리던 저의 승리입니다. 그래서 몸은 무겁지만 마음은 가볍게 산길을 운행합니다.
오후 3시 3분 연하천 산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연하천은 '오묘한 대자연속의 정취어린 샘'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말 그대로 훌륭한 샘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연하천에서 물을 실컷 마시고 수통에도 물을 가득 채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쉬는 사이에 산님들과 기념사진도 찍었습니다. 오늘 산행의 반은 온 것 같은데 이제 마지막 어려움은 해발 1,534m의 토끼봉에 오르는 것이라고 같이 가던 국화대장이 말씀하십니다.

연하천 가기 전의 지리산 경치 1

지리산 경치 2

지리산 경치 3
아닌게 아니라 저만치에 토끼봉이 솟아있는데 제법 높아보여 올라가려면 힘 좀 들게 생겼다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도 오르막 경사가 완만하여 천천히 오르니까 오를만한 것이 4시 20분쯤 토끼봉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부턴 내리막으로 탈출로로 접어드는 화개재까지 쉽게 갈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후 4시 44분 화개재 삼거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서는 지난번 올랐던 반야봉이 아주 가까이에 있습니다만 구름 속에 싸여있어 그 모습을 볼 수 없는 것이 또한 아쉬웠습니다. 그의 펑퍼짐한 정상에 피안으로 가는 배를 올려놓고 두어그루 구상나무에 닻줄을 매어 놓은 다음 봉우리까지 물이 차오르기를 기다리던 상상 속의 반야봉, 한달 전(8월 6일) 실제로 갔던 곳이었습니다.
화개재에서 백두대간길을 내려섰습니다. 우측으로 꺾어 5분 내려가서 오후 4시 49분 뱀사골대피소에 도착하였습니다. 조금 먼저 온 산님들이 쉬고 있었습니다. 여기서 산행의 종점인 반선까지는 아직 9km나 남아 있어 두 시간 이상이 소요될 것 같았습니다. 오늘의 목표시각인 오후 6시 30분에 본부에 도착하기는 이미 틀린 것 같았습니다. 제 뒤에 몇 분이 오고 있다는 게 위로가 되었지만 어둡기 전에 내려가려면 서둘러야 했습니다. 제법 가파른 비탈길을 내려가는데 웬 돌이 이렇게 많은지 완전 돌밭인지라 속도가 붙질 않습니다.
뱀사골 계곡은 많은 아름다운 ‘소’들로 유명합니다. 한참을 내려가서 5시 35분 간장소에 도착하여 잠깐 구경하고 사진으로 간직합니다. 다리를 여러 번 건너고 경치가 좋은 제승대를 5시 20분 쯤 통과한 다음 6시 10분 쯤엔 ‘병소’를 통과했습니다. 이제 어두워지고 있어서 경치를 카메라에 담기는 틀렸습니다. 기계적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습니다. 달관한 사람의 가벼운 걸음이 아니라 지친 자의 버벅거리는 안깐힘이었습니다.

간장소 1

간장소 2
한참을 내려가니 길이 좀 더 정리가 되고 돌밭을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지루한 길을 계속 걸어 오후 7시 5분 버스가 기다리는 주차장에 도착하였습니다. 버스 3대 중 1대는 서울로 떠난 뒤였습니다. 캄캄한 어둠이 밀려오기 시작하며 산행은 끝났습니다. 다행히 배낭속의 헤드랜턴을 꺼내지 않고도 산행을 끝낼 수 있었습니다.
(후기)
‘구름에 달 가듯이 길고 긴 길을 처음부터 끝까지 달관한 자세로 걸어 보리라.’ 결과는 ‘역시 이상은 현실에서 멀도다’였습니다. 초장은 그런대로 잘 나갔는데 뱀사골 상류에서 돌밭을 만난 다음부턴 자세가 흐트러지고 걸음은 버벅거리는 산행초보로 돌아갔습니다.
그분께서 오늘따라 냉정하게 말씀하십니다.
‘하이맛아! 생긴대로 살거라. 꿈이니 이상이니 네가 논하기엔 벅차니라.’
현실에 충실하라는 그분의 말씀?
저는 볼멘 소리로 항변해 봅니다.
‘저만 못 믿어워하시니 억울하옵니다.’
그리고 희망을 말해 봅니다.
‘더 노력하면 안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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