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26 한강 따라 3번째(문래1리 ~ 낙천리) 걸으면서 도연명을 소환하다

2022. 5. 5. 13:23포토DOCUMENTARY

   지난 번 한강상류 걷기 한지 15일이 지났다. 지난 번처럼 친구 세 사람과 함께 세 번째 한강 따라 걷기를 했다. 이번에는 지난번 끝난 문래분교에서 걷기를 시작하여 13.6km를 북쪽으로 걸어 정선군 임계면 낙천리 저온창고에서 끝마쳤다. 비가 올까 거정했는데 다행히 비는 조금 뿌리는 듯하더니 그쳤다.

 

   아침 일찍 청량리역으로 나갔다. 08:22 KTX로 출발, 평창역엔 09:38 도착이다. 지난 번처럼 이교수가 마중 나와서 기다린다. 이교수의 승용차로 출발하였다. 산 위의 구름이 험상궂다.

 

   4인을 태운 승용차는 서울대 평창캠퍼스 건물을 바라보며 남향해서 달리다가 동쪽으로 틀어 오대천까지 나가서 남향하다가 지난 번에도 보았던 백석폭포에 잠시 쉬었다가 북평에서 골지천을 만난 다음 다시 아우라지 쪽으로 꺾어 동북쪽으로 나갔다. 아우라지를 지나 임계까지 부지런히 달렸다. 임계가 목적지는 아니지만 임계의 사통팔달시장을 소개하는 신문기사가 있었으므로 잠시 살펴보기로 하여 시장통에 주차하고 주변을 구경했다.(11:25) 바닥에 비의 흔적을 찾을 수는 있었으나 다행히도 비는 오지 않는다. 시장 주변의 벽화가 유명하다 하여 살펴보는데 작품 수가 많지는 않으나 나름대로 색다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다.(사진 참조)

 

   임계를 떠나 오늘 목적지인 낙천리 저온창고앞에 12시경 도착하여 넓은 공지에 차를 세우고 우선 점심 식사를 하였다. 식사후 임계에서 12시 반에 츨발하여 약 7분후 낙천리에 도착하는 버스에 탑승하여 약 7km 떨어진 문래1리에 쉽게 도착하였다. 지난 번 걷기를 끝냈던 문래분교에서 12시 50분경 걷기를 시작했다. 약하게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데 무시해도 좋을 정도이다.

 

   처음부터 큰 도로를 버리고 강 옆으로 난 길로 걷게 되었다. 큰길이 아니어서 차가 없으니 안전하고 조용하며 흙길이면 푹신하여 걷기에 좋은 데에다 경치까지 더 좋아지니 가능할 때마다 강둑길을 택하게 된다.(이번 길은 전체 거리가 큰 도로를 따라가면 도상거리로 8.2km 밖에 되지 않는데 구부러진 강둑을 따라서 4번 정도 우회한 결과 거리가 13.6km로 늘어났다.)

 

   강둑을 가던 길은 큰길로 돌아왔다가 강을 건너 다시 강둑길을 가는데 정자가 하나 보였다. 잠시 휴식할 겸 정자에 올라보니 주변의 경치가 좋다. 강이 크게 굽어져 소가 있는 곳에 석회암으로 된 절벽도 보이고 강 옆에서 쉬고 있는 사람도 보였다. 약수도 있어 이름이 돈들약수터라고 간판에 설명하고 있다. 약수터로 가보니 약수가 바위 틈에서 솟아나오는 게 아니고 약한 줄기가 위쪽의 바위 위에서 폭포가 되어 물그릇에 쏟아지는 형태였다. 기존의 약수와는 다른 노출식이어서 마실 생각이 나지 않았다. 다만, 이 물은 피부병에 효험이 있다고 쓰여 있다.

 

   그리고 안내판에는 이곳 마을 이름이 용꿈마을이라고 쓰여 있다. 나중에 만난 지역 인에게 그 이름의 유래를 물었더니 원래 용산이라는 마을인데 10여년전 용꿈마을로 새 이름을 추가했다고 한다. 용꿈을 꾸어 횡재수를 얻는다는 속설을 생각하면 이곳 사람들이 노력도 별로 없이 일확천금을 바라는 이름을 원한 건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았다. 정자에서 물러나와 들판을 가로질러 다시 강을 만나 옆에 두고 걸었다. 파이프로 지지해 놓은 사과나무들이 늘어선 과수원이 자주 보였다. 그중 붉은 꽃이 핀 나무는 애기사과라고 하는데 가을이면 작고 앙증맞은 열매가 열리는데 새콤달콤한 맛이 있다고 한다.

 

   유채꽃도 보이고 민들레도 보였다. 강변의 버드나무는 연두색의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고 삼각형 모양의 산 사면은 옅은 녹음으로 덮여 있어 보기가 좋다. 괴불주머니가 피어있고 보리밭의 초록 색깔이 짙푸르게 자라고 있었다. 저 아래 강의 수면 근처에는 검은 옷의 여인 둘이 사진을 찍고 있는지 조용히 배회하고 있었다.

 

   밭과 과수원을 넓게 둘러싼 울타리를 지나가다가 울타리를 이루고 있는 엄나무의 새순을 따고 있는 주인 아주머니를 만나 농사짓기 좋으냐고 물어 보았다. 넓은 밭과 과수원을 소유하고 있지만 농사를 제대로 짓는 게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다.

 

   마지막으로 강을 따라 반원을 크게 그린 다음 큰 길과 만나서 다리로 올라서니 혈천교이다. 다리를 건너 가서는 강을 따르지 않고 큰 길을 따라 목적지인 낙천리 마을로 직행하였다. 낙천1리 경로당겸 회관이 나오더니 미락숲을 가리키는 입간판이 나온다. 조금 멀리 좌측으로 강변에 버드나무군이 보였는데 그게 미락숲인 듯하였지만 가보지 못하였다. 대영 레미콘공장을 지나고 임계농협 농산물산지 유통센터(저온 창고) 건물 앞에 주차된 차도 보여 목적지에 도착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17:22) 4시간 30분 가량의 시간이 흘렀고 GPS에 기록된 거리는 13.6km이다. 이번 여행에서 지난 번보다 경치가 좋아졌다는 것이 일행의 중평이다. 상류보다 내려오니 강물이 불었고 큰길을 떠나 강둑을 따라 걷는 길이 늘어났기 때문인 듯하다. 산과 산 사이에 강을 낀 골짜기도 넓어져 강 주변의 농지도 더 넓게 보였다.

 

   승용차는 다시 아침에 왔던 길을 되돌아서 장평으로 나왔다. 추어탕집에서 간단한 식사를 마친 후 시인은 19:35 군포행 버스를 타러 가고 나는 저녁 20:09 평창을 출발, 21:25 청량리에 도착하는 KTX 열차에 여유 있게 탈 수 있었고 두 분은 다음 날 행사로 평창에서 머물렀다.

 

- 후기 -

 

   1. 농사의 어려움

   하얀 사과꽃이 산들바람에 흔들리고 붉은 속살을 드러낸 밭에는 갖 내린 비의 물기로 윤기가 흐른다. 과수원 울타리에는 가지런하게 신록의 잎사귀들이 올라오고 있으며 대지를 휘돌아가는 강물은 반짝거린다. 훌륭한 풍경이다. 풍경이 저절로 먹여 살리는 게 아닌 것이 문제이다.

   강변에 펼쳐있는 제법 넓은 밭과 과수원에 남편이 기계로 농약을 뿌리고 있었다. 농장 여주인은 울타리 삼아 심은 엄나무에서 갓 자란 새 순을 따고 있었다. 요즘 농촌은 어떨까? 하며 궁금해 하던 차에 평소 하고 싶던 질문을 부인에게 던져 보았다. 사과 농사가 잘 되냐는 질문에, 작년에 별로 좋지 않았는데 올해에도 걱정이라고 한다. 시비와 농약살포, 잡초제거 등 작업이 제때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것이 여의치 않음을 시사하는 것 같았다. 결국 많은 손을 보충해서 투입해야 하는데 노동 인력을 어디서 구하며 얼마의 임금을 주느냐는 질문에는 임계면 면소재지의 인력보급소 소개로 구하는데 일당이 12만원이라고 한다. 과일이나 농작물은 긴 시간 동안 심고 가꾼 다음 수확을 해서 시장에 출하해야 수입을 올릴 수 있는 긴 사이클의 경영이라고 할 수 있다. 긴 시간 동안 계속 비싼 인력에 현금을 투입해야 하는 어려움이 읽혀졌다.

 

   2. 내가 농부라면?

   만약 내가 농사를 생업으로 해야 한다면 그건 내게 큰 재앙일 것 같다. 어려서 부모님의 농사일을 조금 거들어 드리면서 가진 선입감일지도 모른다. 우선 농사일에는 노동과 휴식의 경계가 없는 것 같다. 작물이 자라는 동안 한없이 손이 가고 노동력은 늘 모자라는 경우가 대부분인지라 쉴 틈 없이 움직여야 한다. 물론, 노동시간과 휴식시간을 잘 정해 놓고 지키면 된다는 반론도 있을 수 있고 어느 정도 맞는 이야기이긴 하나 당장 해야 할 일을 두고 쉬러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또한 인생 2모작으로 전원에 정착하여 작게 농사를 짓는 친구들에게 물어보면 농사는 경제성이 없다고 대답한다. 투입한 인풋에 비해서 산출되는 아웃풋이 기대만큼 크지 않다고 한다. 물론 규모가 큰 전업농의 경우에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내가 농사를 짓는다면 큰 규모는 못 짓고 몇 천평 정도의 규모일 것 같아 만족할 만한 수입을 올리기엔 역부족일 것 같다.

   그래서 농사에 전념하다 보면 내 시간을 내어서 등산을 한다든가 글을 쓰며 내 인생을 정리해보는 작업이 불가능해지게 될 수 있다. 일주일에 한두 번 산행을 하거나 걷기를 하고 자주 그 과정을 글로 작성하고 사진과 함께 블로그나 카페에 올리는 것이 요즈음 나의 일상이다. 글을 써보며 생각하는 시간이 나에게는 내 인생의 정리이자 피드백(궤도수정)이다. 농사를 지으면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3. 도연명의 케이스

   동진의 시인 도연명(365~427)은 40세에 벼슬(현령)을 그만 두고 고향의 전원으로 돌아가겠다는 “귀거래사”를 지은 걸로 유명하다. 기록을 살펴보니 그는 고향에 돌아와서 농사를 지으며 시작은 계속하였지만 궁핍에서 벗어나지 못 했다고 한다. 농사의 소출이 시원치 않아 굶주리는 날이 많았고 집이 불에 타서 전소되기도 하였다 한다.

   도시에서의 직업(관직)이 농사보다는 나은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듯하다. 그래도 도연명은 의기가 꺾이지 않았고 인생 후반전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의 글이다.

   “곤궁해도 절조를 지키는 것이 평소의 뜻/ 굶주린다고 해도 그뿐일지니”(유희이작)

   “어찌 정말로 고생스럽지 않겠냐만/ 두려운 것은 춥고 배고픈 것이 아니니/ 빈천과 부귀와 늘 싸우지만/ 언제나 도의가 이겨   얼굴엔 근심이 없다”(영빈사)

   대인의 풍모가 엿보인다. 존경한다. 또한 한국에서 지금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존경스럽다.